지리산 숲 속에서의 하룻밤

- 가을 여행 2018

by Annie


얼떨결에 그렇게 산마루 노을을 보고 나서 한참을 가다 보니 무슨 방갈로 같은 건물들이 보였다. 숲 한가운데 이런 근사한 숙소들이 있다니, 여긴 참 비싸겠다. 그런데 이런 데서 자고 아침에 깨면 정말 좋겠다 생각하며 지나갔다.


잠시 후 드디어 산길을 벗어나 도로를 가로질렀더니 언니가 근무한다는 건물이 보였다. 역시 숲 가운데 뎅그러니 세워진 커다란 원형의 건물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보니 이렇게 훌륭할 데가, 언니가 이런 곳에서 일을 하다니 무척 반가웠다. 난 언니가 무슨 동사무소 건물 모퉁이에서 근무하나 했었는데.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6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으니까. 직원들은 모두 퇴근하고 작은 사무실에 언니 혼자 있었다. 잠시 그곳을 찾기까지의 무용담을 얘기하다 좀 전에 보았던 그 방갈로들 얘기를 했더니 그곳이 오늘 밤 우리가 묵을 ‘수목 가옥’이란다.

“정말?!”

이렇게 좋을 데가.


형부랑 구례 아이쿱 상가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형부는 초밥을, 언니랑 나는 알탕을 시켰다. 형부는 명퇴 후 산밭에 자그마한 농막을 지어놓고 밭일하는 틈틈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을 꾸몄다. 그곳 산밭에서 매실농사도 짓고, 동네 도서관 건립 등에 관여하기도 하고, 한동네에 귀촌한 몇몇 또래 어른들이랑 한학 공부를 함께 하기도 한다.


취미 삼아 한다고는 하나 산등성이에 밭을 갈아 해마다 매실농사를 짓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다. 덕분에 한참 더워지는 매실 수확철에는 도시에서 직장 생활하는 조카들이 휴일에 소집되어 함께 진땀을 흘리곤 한다.


형부는 굳이 내게 마을 도서관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예전 아버지의 서가에서 본 것 같은 낡고 오래된 책들, 그리고 집안에서 잠들어 있다가 이곳으로 입양되어 온 것 같은 책들이 그래도 나름 틀을 갖추어 꽂혀있었다. 내일은 이곳에서 시화전도 열린다고 한다. 형부는 내게 이곳에서 사진전도 한 번 하라고 한다.


그간 여행을 다니면서 찍어놓은 사진들이 꽤 있으니 하자고 들면 개인전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장소가 이런 시골 마을이든 어디든, 일단 전시공간이 있으면 준비는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더 찍게 되고, 일회적이든 연속적이든 한 걸음을 내딛고 또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긴 하다. 작은 시골 마을이니 두려움 없이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고 사진도 모아서 정리해보자.


언니 네는 예전에 살던 집터에 새로 집을 짓고 있어서 임시로 비어있는 작은 집에 살고 있다. 형부만 그 집에 남겨두고 언니랑 나는 수목가옥으로 갔다. 언니는 트럭처럼 단단하고 큰 차로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지름길이라며 거침없이 운전해나갔다.


방은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고 내부는 그냥 한식 원룸 형태로 밋밋해 보이지만 안온했다. 널찍한 테라스가 있어서 저녁엔 맥주나 와인 한 잔, 아침엔 커피 마시기에 딱 좋을 것 같았다. 조금 춥긴 할 테지만.


언니는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스무 살 때 혼자 제주도 여행 갔던 얘기, 내가 사고 낸 차에 함께 타고 있다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얘기를 하면서 언니의 얼굴은 생기 있게 피어올랐다. 한 달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결혼 후 처음으로 선물 같은 휴식을 즐겼다고, 같은 병실의 암환자들과 함께 보내면서 자신이 그들에게 햇살 같은 존재였다며.


언니에겐 가족들과 떨어져 병원에 있었던 그때가 마치 어릴 적 혼자 여행했을 때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남편과 아이들을 돌보고 살림을 꾸리고 늘 누군가를 보살펴야 하는 삶에서, 온전히 자신만을 돌보면 되고, 살림에서도 자유롭고, 다른 환자들에 비하면 환자랄 것도 없이 건강한 몸으로 그들의 고단한 삶을 들여다보며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주었던 그 시간들이.


혼자 하는 여행은 자신에게 주는 그런 선물 같은 시간이다. 모든 의무와, 기계적인 일상과 권태와 속박으로부터 풀려나, 신기한 것들을 만나고, 잠들어있던 감각들을 하나둘씩 깨워서 마침내 활짝 열리게 하는.


아침에 테라스로 나가 커피를 마셨다. 안개가 몰려와 방갈로 앞의 소나무 숲이 신비롭다. 형부 아침을 챙겨주고 딸들과 주말여행을 떠나기로 한 언니는 먼저 떠났다. 혼자 남은 나는 느릿느릿 움직였다. 주변의 풍경이 아기자기하고 빛깔들이 예뻤다. 고요한 숲길에서 완벽한 가을날의 산책을 했다. 더 여유를 부리자면 그 숲의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좀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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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보내는 나의 일상도 밝았고, 여유로웠고 흔히는 빛나기까지 했었다. 그럼에도 이 여행에서 마주치게 된 것들, 따뜻하게 쏟아지는 햇살, 바람소리, 맑은 공기, 푸른 하늘, 가지에 매달린 혹은 땅에 떨어진 알록달록한 잎들, 그것들이 바람에 떨어지며 다른 잎에 가 닿는 소리들, 발에 밟히는 소리들, 여행에서 만나게 된 그 모든 것들이 내겐 또 다른 축복처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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