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여행 2018
점심때쯤 지리산 숲을 떠나 순천으로 향했다. 도중에 승주 선암사에 들렀다가 순천만으로 가는 일정이다. 승주에 접어들어 선암사로 가는 길에 난데없이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원래는 산인데 댐을 막아서 그렇게 된 건지 산들이 몸통째 물속에 잠겨있는 모습이 놀랍고 신비로웠다.
찻길을 따라 쭉 이어져 있는 호수는 건너편엔 화려한 단풍들이, 이쪽 편엔 물풀과 갈대들이 얼크러져 너무 아름다웠다. 게다가 가을 햇빛이란 다들 알지 않는가, 유난히 식물들을 탱글탱글 빛나 보이게 한다는 것. 나도 모르게 “와아, 아름답다. 너무 아름답다.”를 연발했다.
선암사를 몇 번이나 다녀갔었는데 이 아름다운 호수를 왜 처음 보는 거지? 난 도중에 두 번이나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려 그 장관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사진도 찍었지만 어떻게 해도 사진은 그 아름다움을 다 담지 못했다. 운전하느라 길 따라 난 호수를 마음껏 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름도 근사했다. '상사호'!
선암사 입구를 1.6km 앞두고부터 차들이 막혀서 움직이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차들 몇 대가 머리를 돌려 나갔다. 선암사는 한적한 산사를 느끼는 게 제맛인데 이렇게 사람들이 많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를 이 행렬에 더 서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오늘 큼직한 일정 중에 순천만이 포함되어 있기도 해서 미련 없이 차를 돌렸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쪽으로 오게 되면 그때 들르자 하고.
내비는 고속도로를 추천하지만 나는 오는 길에 봐 두었던 이정표를 따라가기로 했다. 그쪽이 호수를 끼고도는 길이기도 하고 더 한적한 국도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짐작대로 그쪽은 호수를 따라 단풍나무들이 늘어선 온통 붉은 길이었다. 어디에도 차를 세울 만한 여유 공간이 없는데 사람들은 기어이 찻길에 차를 세우고 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뒤에 차가 따라오지 않는 것 같으면 이때다 싶어 차의 속도를 줄여가며 그 풍경들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꼭 자세히 보지 않아도 그 단풍나무 길이 내뿜는 분위기에 한껏 취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다 백미러로 뒤에 커다란 트럭이 바짝 따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내비가 이쯤에서 회전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오른쪽이었나?
오른쪽이 두 개네. '어어' 하며 삼거리 앞에서 머뭇거리다 뒤따라온 트럭이 '빵' 하고 경적을 울리자 난 급히 핸들을 틀었다.
내가 얼떨결에 들어선 그 길은 노랗고 환한 은행나무 길이었다. 커다란 은행나무들이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고 바닥에는 노란 은행잎들이 두툼한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처럼 쌓여 있었다. 은행잎들은 널찍한 인도를 뒤덮다 못해 차도까지 내려와서, 오가는 차들이 일으키는 바람에 날려 길 가운데에 차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곳은 작은 휴게소로 빠지는 길이었다. 난 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그 은행나무 길을 걸어보았다. 감탄사와 미소가 절로 터져 나오는, 온통 노랑으로 환한 세상이었다. 두텁게 쌓인 은행잎 위로 바람이 불 때마다 수많은 잎들이 떨어져 내렸고 바닥의 잎들도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 다녔다. 나는 계속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앞에서 오던 차가 멈추어 서서 내가 사진을 찍도록 기다려주고 있었다. 뒤에 차가 따라왔는데도 그 차는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난 그 차가 나를 기다려 준 것인지, 사정이 있어서 잠시 멈추어 서있었던 것인지 그때는 확신할 수가 없어서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지나고 보니 내가 사진을 찍도록 기다려 준 것이었다. 그 여유와 배려에 기분이 좋았다.
잘못 들어선 길에서 마주하게 된 눈이 번쩍 뜨이는 아름다움. 가끔 여행에서 만나게 되는 매직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