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일 동안의 제주여행, 2019
긴 하루를 보내고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사라가 가져온 팩을 하나씩 얼굴에 붙이고, 벽에 다리를 거꾸로 기댄 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내일은 함께가 아닌 따로 여행에 나서 보기로 한 날이다.
사라가 이제 자겠다고 해서 불을 끄고 누웠다. 지난밤 같은 숙면을 기대했던 나는 새벽 3시까지 잠 못 들고 이런저런 생각들로 뒤척였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지도랑 펜, 안경을 들고 욕실로 가서 세면대 틀에 올라앉아 일정을 짜보았다.
여러 가지 옵션들을 머릿속에 그려보았지만, 차가 없이 움직여야 되는 한계가 있어서 테마를 미술관으로 잡았다.
본태 박물관과 추사관. 지도상으로는 이 두 군데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본태 박물관 바로 근접한 곳에 있는, 사진 상으로는 물 위에 떠있는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키는 방주 교회까지 일정에 포함시켰다. 산속에 있다는 식물원 같은 카페는 상황 봐서 여력이 되면 갈 수도 있고.
한 시간 정도 그렇게 욕실에서 여행 계획을 짜다가 다시 침대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각성상태였다. 그러다 다섯 시쯤 잠이 든 것 같은데, 그때부터 시작된 꿈은 기괴하기도 할뿐더러 너무나 생생해서 무서웠다.
옆에 누워서 자는 사라의 얼굴 한 면이 온통 커다란 검은 반점들로 뒤덮여 에일리언 같았고, 손만 뻗으면 닿을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너무 무서웠다. 또 무엇엔가 쫓기면서 위협당하는 것도 딱 실제 같아서 무서움에 소리를 질렀다.
7시쯤 깨서 이미 깨어있던 사라에게, 내가 자다가 소리 지르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무슨 소리를 내더라고 했다. 사라가 좀 더 자자고 해서 다행이다 싶었다. 다시 9시 반까지 잤으니 그래도 4시간 남짓 잔셈이다.
사라는 비가 오고있으니 아침에 호텔에서 수영도 하고 사우나도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잠시 내리던 비가 멈추고 하늘이 개인듯하자 그녀는 날이 개었을 때 먼저 돌아다녀야겠다며 씻으러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그녀는 준비가 다 끝나면 나 먼저 나가도 된다고 했다.
사라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준비를 다 마친 나는 그녀에게 밝게 인사하고 나와서 로비 화장실을 이용해 장을 조금 비웠다.
어제부터 메모를 위해 펜이 필요했던 나는 지나가는 택시를 바로 탈까 하다가, 펜을 사러 편의점부터 들렀다.
계산을 하려고 보니 휴대폰이 없었다. 물론 휴대폰에 끼워둔 신용카드도 없고 수중에 현금도 없었다. 룸에 휴대폰을 두고 온 것이다. 편의점에 먼저 들렀기에 얼마나 다행인가?
다시 호텔 룸으로 돌아갔더니 사라가 그런다. 본태 미술관에 전화를 했었다고. 빨간 원피스에 긴 머리 여자를 보거든, 호텔에 휴대폰을 두고 갔다고 전해달라고. 하하. 세심한 사라.
그날 저녁에 사라가 그랬다. 자기도 나를 따라 본태 미술관에 갈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아침에 내가 혼자 여행에 너무 신나 있는 것 같아서 포기했다고. 크크, 함께 갔어도 좋았을 텐데.
다시 호텔을 나와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먹구름을 들치고 드러난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너무 예뻐서 마음이 쨍하니 환해졌다. 혼자만의 모험 길에 나선 것도 나를 설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