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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Sep 03. 2021

천사 같은 커플, 레기나와 데이비드

- 바르셀로나


        

  새벽 3시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잠이 깼다. 5시쯤엔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사진과 메시지를 보냈다. 7시 30분까지 그렇게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숨죽이고 있다가,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샤워를 했다. 


  내가 좋아하는 베이커리 카페, ‘Bluebard’에 갔다. 이곳은 지금도 그리운 곳이다. 빵을 사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고, 안쪽 카페는 예약석 몇 곳을 빼고는 빈자리가 없다. 살구 파이와 작은 과일 팩에 커피까지 주문했다. 통틀어 5.6유로였다. 한국 돈으로 하면 7천 원 정도, 그러나 퀄리티는 비교할 수 없이 좋다.



베이커리 카페, ‘Bluebard’, 


  오늘은 가우디가 태어난 몬세라티에 갈까 했지만 피게레스에 다녀왔던 어제 너무 피곤해져서, 잇달아 교외에 나가려던 계획은 접기로 했다. 뭐 하러 그렇게 힘들게? 그냥 이 카페에서 나머지 바르셀로나 일정을 계획해 보며 빈둥대다가, 오후에는 그 길 끝에 나오는 해변에서 노을이 질 때까지 뒹굴어야지. 이제 사람들도 좀 돌아보고.  

    

  브런치 후에 호스텔에 돌아왔을 때, 아침에 화장실에서 마주쳐 인사 나누었던 룸메이트 레기나와 다시 마주쳤다. 키가 크고 마른 그녀는 독일에서 왔고 영어가 서툴렀다. 그래서 몇 마디 서툰 영어를 하다가 함박웃음으로 마무리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언어 소통이 잘 안 될 때, 사람들은 온 마음을 미소와 몸짓에 실어 표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서로 간에 더 정감이 느껴지는 것 같다. 

  서로 오늘 일정에 대해 물었는데 내가 오후에 비치에 갈까 생각 중이라고 했더니, 자기네도 비치에 간다고 했다. 그녀는 남자 친구와 여행 중이다. 함께 가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언감생심 커플이 비치에 가는데 끼겠는가.   

  

  호스텔 라운지 소파에서 뭉그적거리다가, 1시 반쯤 일어나서 비치에 갈 짐을 꾸려 나왔다. 리셉션 레이디에게 비치에 가는 길을 물어서 메트로 노선까지 알아냈던 참이다. 그런데 메트로 역을 찾지 못해 계속 길을 헤맸다. 어깨에 멘 가방은 크고 무거웠다. 깔고 누울 큰 타월과 책과 카메라 등등, 짐이 많았다. 역을 찾다가 거의 지칠 때가 되어서야 드디어 역을 발견했다.


  역으로 내려가긴 했는데 양 방향 중 어느 쪽 탑승구로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쩔쩔매고 있는데, 저 쪽 인파 속에 그 룸메이트 커플이 보였다. 어찌나 반가운지 난 반사적으로 팔을 높이 치켜들고 격하게 손을 흔들었다. 

  아까는 감히 함께 가자는 청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마주친 마당에 이건 운명이다 하고 묻어가면 되는 것이다. 혼자 해변에서 꾸어온 보릿자루처럼 멋쩍게 앉아있지 않아도 될 터였다.  

    

  레기나 남자 친구의 이름은 데이비드였다. 그들은 둘 다 신입 교사이고, 일주일의 휴가를 바르셀로나에서 보내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했지만, 목소리가 너무 조용한 데다 말이 빨라서 알아듣기 쉽지 않았다. 


  그는 둘이 커플이라고 해서 레기나와 둘이서만 걷는 법이 없었고,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처럼 셋이 나란히 걸을 수 없는 곳에서는 오히려 나와 나란히 서서, 내가 소외되지 않도록 계속 배려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영어가 서툰 레기나가 소외되지 않도록 그와 둘이서만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고, 그 커플 사이에 내가 방해꾼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데이비드는 정말 예쁜 남자였다. 친절하고, 온 얼굴에 착함이 묻어났다. 레기나도 큰 키에 시원한 멋을 풍겼다. 무엇보다 너무 착했다.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운 천사 같은 커플이다.     


  해변은 크고 아름다웠다. 주변의 도로도 사람들이 산책과 조깅, 블레이드 등을 즐길 수 있도록 잘 조성되어 있었다. 시원시원하고 고급스럽고 이국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바다 빛깔이 너무 파랬다.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가는데 한 중년 남자가 완전 누드로 걸어 다닌다. 

  '누드 비치인가? '

  우린 깜짝 놀라서 멈칫했다. 데이비드가 더 놀란 것 같았다. 딱히 누드 비치는 아니었지만, 드물게 누드로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맞춤한 자리에 도착했을 때, 난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끼리 있는데 내가 괜히 방해가 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우리랑 함께 있어.”

  그렇게 묻는데 누가 그렇다고 대답할까 만은, 그래도 난 마음이 편해졌다. 예의상 한 말이었을망정 너무 고마웠다. 

  

  가능하면 그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커플이라 해도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그렇게 편을 가를 필요도 없었고, 오히려 스스럼없이 어울려 사진도 찍고 그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나친 배려도 병이다.     


  우린 겉옷을 벗고 수영복 차림이 되어 타월을 깔고 누웠다. 태닝은 내 취향이 아니다. 수영복 차림으로 용용하게 태닝 자세를 취했지만, 오래도록 그러고 있을 자신은 없었다. 지난겨울에 넘어져서 얼굴에 상처 난 곳이 햇빛에 착색될까 봐 걱정도 되었다. 


  윈드 서핑하는 중년의 남자들이 꽤 있었다. 짙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돛을 단 서핑 보드들이 예뻤다. 





  서핑하는 것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다. 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도 찍다가 누워서 셀카를 찍기도 했다. 그 커플도 찍고 싶었지만 역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아이폰 카메라 소리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그렇게 조심하느라 그 커플 사진을 안 찍었던 것이 지금은 후회된다. 어쩌면 그들도 내가 사진 찍어주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나의 고리타분한 한국식 마인드로 인해, 보다 즐거울 수도 있었던 기회를 날려 버렸다. 

  한 낮은 지난 시간이었으므로 약간 쌀쌀했다. 햇빛을 걱정하던 차에 그들이 그만 갈 건데 더 있을 거냐고 해서, 얼른 털고 일어섰다.    

 

  돌아오는 길에 저녁에는 분수 쇼를 보러 가고 싶다고 했더니, 레기나가 데이비드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도 내일 거기 가볼까”

 ‘오늘 함께 가면 좋을 텐데...’ 난 또 청하지 못했다. 


  호스텔에 돌아와 씻으려고 하는데, 레기나가 자기네도 분수 쇼를 보러 가기로 했다고 함께 가겠느냐고 했다. 데이비드 친구도 만나서 함께 갈 예정이라고.

  “너무 좋지!!”


  우린 들떠서 샤워를 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데이비드는 이미 준비를 마치고 로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뜻한 연청 셔츠를 입은 그는 눈이 부시도록 멋있었다. 준비를 마치고 나온 레기나도 산뜻했다. 난 연청 진에 흰 긴팔 티, 스카이 블루 카디건을 입었다. 하지만 그 차림은 내가 캐리어를 끌고 비행기를 탈 때나 원거리 버스를 탈 때의 차림이었을 뿐, 산뜻한 외출복은 아니었다.   

  

  우린 메트로를 타고 스페인 광장으로 가서, 데이비드의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지하도를 올라와 스페인 광장을 바라본 순간, ‘와! 이런 게 광장이지!’ 광장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싶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넓고 화려하고 붐볐다. 


  데이비드의 친구는 ‘헤바’라는 여자였고, 역시 선생님이었다. 그녀의 남자 친구도 선생님이었는데, 지금은 석사과정 공부 중이라고 했다. 소개받으면서 이름을 말했는데 놓쳐버렸다. 전직 교사인 나를 포함해 5명 모두 교사였던 셈이다.     


  우린 뷰가 좋다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서 광장과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그 옥상은 360도를 빙 돌면서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광장 한쪽 끝에는 카탈루냐 미술관이 궁전 같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다른 쪽 끝에는 멀리 산이 있었는데, 산꼭대기 뒤로 사그라다 파밀리에의 긴 첨탑들이 보였다. 얼마나 높으면 산보다 높이 솟아 있을까 싶었다.

  


스페인 광장 


  지하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내려갔다. 난 생전 처음 서울 구경 온 시골 아이처럼 신기해하며 두리번거렸다. 피자나 스페인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누구의 추천인지 일식당으로 갔다. 


  식당에 자리를 잡기 전, 몇 분 동안 헤바의 남자 친구와 단둘이서 일행을 기다려야 했다. 1,2초 말없는 어색함이 흐른 후, 그가 내게 스페인어나 영어를 할 줄 아는지 물었다. 내가 영어를 한다고 했더니, 그때 막 돌아온 데이비드에게 그가 항의하듯이 말했다. 


  “얘는 독일어 모르는데, 우린 왜 여태 독일어로 얘기했던 거야, 영어로 안 하고?”

  레기나가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더니 그는 깜짝 놀랐다. 하긴 지금까지 여행 중에 만났던 독일인 치고, 영어를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만난 독일인들은 모두 네이티브처럼 영어가 유창했다. 딱 한 명, 라오스 호스텔에서 만난 무척 수줍음을 타던 걸 빼고는.   

  

  그때부터 그는 줄곧 영어로 말했고 사람들이 독일어로 얘기할 때는, 내내 그것을 번역해 주었다. 그 자신도 상당히 말을 많이 하는 편이어서, 난 아주 편하게 그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그때까지 레기나, 데이비드 커플 틈에서, 영어에 서투른 레기나를 배려하느라 데이비드와도 마음껏 얘기하지 못했던 참이다. 커플은 커플끼리 얘기해야 하고, 그 사이에 끼는 것은 실례라는 억압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식사 후에, 카탈루냐 미술관 아래 분수 쇼가 열리는 곳까지 걸어갔다. 멀리서 본 카탈루냐 미술관은 그 위풍과 우아함이 궁전 같았다. 주위는 어느새 어둑해졌다. 우리 중 누구도 잘 알지 못하는 그 길을 함께 걸으며, 기억나지 않는 얘기들을 나누었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드디어 웅장한 음악이 들리며 분수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약 5초 후, 나의 탄성이 잦아들기도 전에 분수 쇼는 끝나버렸다. 허망했지만 우리는 우리가 본 그 마지막 5초가 하이라이트였을 거라 여기자며 아쉬움을 달랬다.  우린 거기서 맥주 한 캔씩을 마셨고, 바에 가기 위해 메트로를 탔다. 





  헤바 커플은 시 외곽의 아파트에 머물고 있어서 우리가 메트로에서 내린 그곳에서 심야 버스를 타면 언제든 갈 수 있고, 우리는 20분 정도 걸으면 호스텔에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번화하고 아름다운 거리, 'La Lamblars'였다. 


  큰 도로를 건너 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더니, 잠시 후에 작은 광장이 나왔다. 아! 새벽 한 시가 넘었는데도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 빙 둘러선 노천 레스토랑들마다 사람들로 가득했고, 중년의 인라인 스케이트 그룹이 떼를 지어 왁자하게 스쳐갔다. 

  한쪽에선 청소차가 물을 뿌리고 거대한 기계 솔이 회전하며 길바닥을 박박 문질렀다. 그것이 바르셀로나의 거리가 그렇게 깨끗한 이유였다.     


  우린 그 골목의 바를 하나 찾아들어 갔고 거기서 칵테일을 한 잔씩을 했다. 그 바를 나와서 조금 걸으니, 가우디 기념관이 있는 거리가 나왔다. 그 주변은 좀 전에 헤바 남자 친구가 추천했던 ‘고딕 쿼터’라는 곳이었다. 정말 분위기 좋은 거리였다. 서점과 조용한 카페 등이 있는 바르셀로나 안의 특구 같은 곳이라고 했다. 

  우린 그곳의 또 다른 바에 들어갔다. 이층으로 올라가니 의자들마다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모두 엔틱 풍의 정말 독특한 모습이었다.


  난 이 멋진 오후와 밤을 보내게 해 준 그들에게 감사하며, 모두에게 맥주 한 잔씩을 샀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그 멋진 스페인 광장을, 카탈루냐 미술관과 멀리 산 너머로 보이는, 사그라다 파밀리에의 첨탑을 조망할 수 있는 거대한 회전 루프탑을, 밤거리의 바와 카페들, 새벽 한 시를 넘겨서도 활기가 넘치던 라 람블라스 거리의 골목들, 수많은 대화와 함께 무리 지어 밤거리를 쏘다니는 즐거움을 어떻게 누릴 수 있었겠는가? 


  그들 모두 나와 함께 한 시간을 진정 즐거워했다. 여행 중 만나는 여행자들에게는 마음을 사리지 않아야 한다. 충분히 함께 즐길 수 있음을 알고 누려야 한다. 그들도 나와 함께 신기하고 재미있고 좋은 기억을 만드는 것이다.

  드디어 지치기 시작한 우리는 심야버스를 타러 가는 헤바 커플과 포옹하고 헤어졌다. 

  꿈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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