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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Sep 04. 2021

몬주익 성을 내려오다 만난
호안 미로

- 스페인,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어젯밤 우리는 새벽 3시에 호스텔로 돌아왔다. 자리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계속 문을 여닫는 소리 때문에 선잠을 잤다. 우리도 늦었는데 우리보다 더한 사람들이 있었나 보다. 아침 아홉 시 반까지 누워 있어도 잔 것 같지 않고 피곤하다. 


  샤워하고 내 사랑 bluebard에 가서 브런치 타임을 가졌다. 커다란 요구르트와 샌드위치, 커피. 그리고 살구 타르트는 테이크 아웃했다. 좋은 베이커리가 분명하다. 늘 자리가 없고 긴 줄이 서있는데, 오늘은 나오다 보니 문 밖에까지 긴 줄이 서 있다.    


  레기나와 데이비드는 나갈 채비를 마치고 있었다. 난 피곤해서 쉬다가 오후에 나가겠다고 했다. 호스텔 뒤뜰의 소파에 담요를 덮고 앉아 이것저것 기록을 하다가, 오후 한 시 반 넘어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몬주익 성에 가는 거다. 


  페럴렐 역에서 내려 푸니쿨라를 타면 된다고 했는데, 지하철 역에서 나와 아무리 둘러봐도 푸니쿨라를 어디서 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헤매다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었더니 지하철 역 안에서 탄다고 했다. 이미 나와 버렸는데... 다시 지하철 표를 끊고 들어가니, 푸니쿨라를 타는 곳이 나왔다. 푸니쿨라가 뭔가 했는데, 특정 관광 구간을 짧게 오가는 작은 셔틀 기차 같은 것이었다.


  푸니쿨라에서 내려 이번에는 케이블카를 타야 했다. 케이블 카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무척 새롭고 근사했다. 특히 가까이서 너무나 파랗고 시원한 바다가 보일 때는 아! 하는 탄성이 나왔다. 

  그렇게 도착한 몬주익 성. 성안에 입장하려면 또 줄 서서 티켓을 끊어야 한다. 밖에서의 조망도 충분히 훌륭한데 꼭 들어가야 할까 망설이다 그냥 5유로를 내고 들어갔다. 





  안 들어갔더라면 어쩔 뻔했나.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에 색이 번진 듯 얇은 띠가 있고 그 띠 위와 아래는 색이 똑같다. 하늘과 바다를 거꾸로 뒤집어놓아도 어느 것이 바다고 어느 것이 하늘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하늘빛도 바다 빛도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바람이 좀 불기는 했지만, 따스한 햇살과 이 온통 푸른빛 가운데 그냥 녹아들 것만 같다. 이렇게 온종일 여기에 앉아있고 싶다. 50년 넘게 살아온 내 삶이 후한 보상을 받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플끼리 온 이들은 손을 잡고 천천히 걷거나, 벤치에 한 사람이 앉으면 다른 사람이 그 무릎을 베고 누웠다. 혼자도 이렇게 좋은데 둘이면, 더구나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바다와 하늘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5분 정도 걸어서 ‘호안 미로 미술관’에 갔다.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부터 조금 지쳐있었다. 배도 고팠다. 그렇게 기진해서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작품들을 흘려 보았다. 이제 그만 좀 끝났으면 할 정도로 지쳤다. 어느 벽에는 호안 미로의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나는 내 작품이 자연스러워 보이면 좋겠다.

  새들의 노래처럼,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그렇게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은 듯

  그러면서도 긴 사색의 흔적이 

  드러나기를’


  미로가 그의 작품에 바라는 것처럼, 내 남은 삶 또한 그랬으면 좋겠다. 깊이를 가지면서도 경직되지 않고, 평범하면서도 진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시관을 다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의자에 앉아 영상을 보았다. 미로가 80-90세 정도의 할아버지로 보이는 때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냥 앉아서 그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 키보다 훨씬 큰 캔버스에 페인트 통만 한 물감 통을 들고 다니며 그것을 캔버스 위에 붓고, 대걸레 크기의 붓에 찍어서 뿌리고, 그 위를 걸어 다니며 붓으로 문지르고, 심지어는 발로 문지르다 급기야는 바닥에 눕혀 놓은 채, 캔버스에 불을 질렀다. 캔버스 가운데 부분을 태운 다음, 그 위에 또 물감을 흘려서 문지르고 밟아서 다지고, 그렇게 온몸으로 작업하는 모습이었다. 

  영상에서는 그렇게 작업한 커다란 캔버스들을 너른 정원 같은 곳의 여기저기에 세워둔 채 말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예술가의 꿈을 접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예술가라는 직함을 얼마나 안이하게 여기고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발견한 호안 미로의 이 글은 또 다른 생각을 해보게 한다.


  ‘뭔가를 실현시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불가능한 것에 달려드는 것이었다.’


  새로운 발명이나 제도 같은 것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때까지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로 새로운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불가능했던 것들을 가능하도록 생각하고, 요구하고,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가능한 것들에만 안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호안 미로의 미술관은 그의 작품 자체보다도, 단편적이긴 하나 그의 작업 방식과 생각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 더 기억에 남았다.      





미술관 내에 있는 아이들의 놀이 체험공간



 미술관을 나오면서 너무 지치고 배고파서 걷기도 힘들었다. 내 가방 안에는 테이크 아웃해 온 살구 타르트가 있었지만, 여긴 길거리고 공원이고 뭘 먹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수중에 먹을 것을 두고서도 아사할 지경이었다. 


  드디어 호스텔에 거의 다 와서야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오믈렛과 모차렐라 치즈 샐러드, 그리고 샹그리아 한 잔을 시켰다. 얇게 썬 토마토와 한 통을 다 썰어놓은 것 같은 엄청난 양의 모차렐라 치즈, 한 잔 가득 나온 샹그리아에 피로가 절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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