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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Sep 05. 2021

알람브라 궁전을 돌아보고

- 그라나다, 스페인

   


   아침에 호스텔을 나온 나는 무조건 직진해서 걸었다. 그라나다 지도를 보니, 그쪽으로 가면 재스민이 말한 알바이신이 나올 것 같았다. 따스한 햇살과 상쾌한 아침 공기를 즐기며 걸을 수 있을 만큼 걸었다. 어느새 내가 걷고 있는 곳이 알바이신이었다. 멀리 알람브라 궁전의 모습이 보였다. 


  산 외곽을 따라 난 길을 걸어 올라갔더니, 그 길을 따라 여러 개의 작은 바들이 흩어져 있었다. 밤에 오면 그곳의 분위기가 무척 독특하고 근사할 것 같았다. 과연 내가 동행을 만나 밤에 이곳을 올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바이신 언덕의 바 레스토랑



   다시 언덕길을 내려와 쭉 늘어선 야외 레스토랑 가운데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바로 앞에 알람브라 궁전의 뒷모습을 가까이서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조망보다도 연두 빛이 흐드러진 이곳 풍경이 더 매혹적이었다. 연보라 빛 등꽃들도 햇살에 눈부셨다. 너무 예쁘고 너무 따스하고 너무 싱그러웠다. 그냥 하루를 거기에 앉아 보내고 싶었다.     



저 높이 슬쩍 보이는 알람브라 궁전 



  


  알람브라 궁전 관람시간은 오후 2시로 예약되어 있어서 다시 숙소에 들렀다 나오기에는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인터넷 예약이 정확한 것인지 미리 확인해두지 않으면, 65유로를 날릴 수도 있겠다 싶어서 미리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가이드와 만나기로 한 티켓 부스 근처에 도착했을 때, 예정 시간까지 두 시간이나 남아있었다. 기다리다 지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적중해서, 실제 궁전 안에 들어갔을 때는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예상했던 대로 가이드를 동반한 투어는 늘 수동적으로 되기 마련이어서, 활기와 기대감이 툭툭 떨어졌다. 궁전은 광대하고 아름답기도 했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는 가이드의 설명은 탐험에 대한 의욕을 저하시키면서 지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인터넷 글에서는 궁전 안에 들어서면 오렌지 향이 난다고 했다. 그 말에 매혹되어 한껏 기대했었는데, 그날은 오렌지 향 대신 역한 살충제 냄새가 진동했다. 두 시간 반 동안 그 안에 머물면서 내내 그 냄새를 맡고 다녔더니, 그렇지 않아도 녹초가 된 참에, 투어가 끝날 무렵엔 토할 것 같았다. 숙제를 마치듯 돌아보다가, 나중엔 그만 보고 빨리 나오고 싶었다. 물론 사진 찍을 의욕도 없었다.     


  호스텔로 돌아와 기진해서 쉬고 있을 때 재스민이 돌아왔다. 재스민도 외출했다가 너무 피곤해서 근처 스파에 다녀왔다고 했다. 스파가 정말 훌륭해서 그곳에서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그곳에서 만난 두 명의 독일 걸도 저녁에 우리에게 합류하고 싶다고 했는데, 괜찮은지 묻는다. 물론이지. 


  그녀는 내일 아침 9시에 출발하는 말라가행 버스표를 예약했다고 했다. 난 오후에 출발할까 했었던 참인데 마음을 바꾸었다. 재스민이 버스 예약 사이트를 검색해 보더니 같은 버스는 아니지만, 9시에 출발하는 다른 버스에 좌석이 남아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버스를 예약했고 숙소도 재스민과 같은 곳으로 예약했다. 

         

  우리가 막 나갈 준비를 마쳤을 때, 새로운 룸메이트가 들어왔다. 따발총처럼 터지는 그녀의 질문 공세에 우린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현재 영국에서 석사 과정 중인 일본인으로 35세였다. 이름은 까먹었다. 우리가 나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함께 가도 되냐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그 일본 걸은 말도 많았지만 목소리도 크고 자기주장이 강했다. 우린 재스민이 고른  좋은 야외 레스토랑에 갔는데, 일본 걸이 메뉴를 보더니 너무 비싸다고 자기는 다른 데 가서 혼자 먹겠다고 했다. 재스민이 그러면 여기서는 음료만 마시고 더 싼 곳을 함께 찾아보자고 했다.


  기다리던 독일 걸들이 오자 우리는 다른 곳을 찾아 나섰다. 한국으로 치면 골목길의 허름한 식당 같은 곳이었다. 일본 걸이 자기는 이런 데를 좋아한다고 했다. 자리가 없어서 정말 분위기라고는 없는 화장실 앞 테이블에 앉았다. 

  가격은 좀 전의 그 훌륭한 레스토랑과 별 차이 없었는데, 문제는 재스민이 꼭 먹고 싶어 했던 메뉴가 거기에는 없는 것이었다. 내가 시킨 포테이토 타파스도 모양이 영 좋지 않았다. 그냥 찐 감자를 얇게 썰어서 그 위에 오일을 뿌린 것처럼 보였다.


   독일 걸 중 한 명이 내게 물었다.

   “한국인들은 어떤 특성이 있어?” 

   내가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자 일본 걸이 나섰다.

   “내가 말해볼까? 공격적이야” 

   그녀가 한 마디로 단정하듯 말했다. 

   자기가 아는 일본인이 한국인과 결혼하려고 했을 때 한국인의 부모가 일본인과는 안 된다고 반대했었다고, 한일 간의 식민 관계가 벌써 몇십 년 전 일인데 아직도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듯 말했다.  '물론 한국인들이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다.


  자국민이 보는 자국민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타국인이 중간에 낚아채어서 이런 비판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 좀 예의 없고 경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도 섣불리 대꾸하기 민감한 것이어서  잠자코 있었다. 그녀가 사려 깊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함께 있던 모두가 이미 눈치챘던 터이므로. 

  기대했던 아랍 바는 가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있다가 왔다. 

    

  다음날 아침 재스민과 나는 말라가로 갈 9시 버스를 타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그녀는 행동이 빨랐다. 매사 더듬거리고 느린 나와는 대조적이었다. 맵치에 구글맵도 없는 나 대신 항상  앞장서서 길을 찾았고, 버스 예약하는 법도 알려주었다. 


  그녀는 다음 날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면, 전날 저녁에 캐리어에 모든 짐을 다 싸놓고 간단한 세면도구만 숄더백에 넣어두었다가 홀가분하게 방을 나섰다. 머리 감는 것도 아침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 일찍 출발해서  점심때쯤에나 목적지에 도착하면, 오후부터 바로 그 도시를 즐기는 것이다. 좋은 팁을 배웠다.


  재스민과 나는 버스는 달랐지만 출발과 도착 시간이 같아서, 터미널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기다렸다가 만나기로 했다. 버스에서도 와이파이가 터졌다.

 “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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