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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Sep 06. 2021

리스본행 버스 티켓

 - 리스본, 모든 게 완벽해!

      


  아직 세비야다. 리스본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터미널 근처의 노천 바에 있는데 스페인어로 된 메뉴를 하나도 알 수가 없다. 웨이트리스와 의논하다 결국 틴토 베라노를 시켰다. 상큼하고 가격도 착한 틴토 베라노.   웨이트리스는 말이 안 통하는 나와 함께 내 음료를 함께 골라주며 무척 즐거워했고, 유쾌하게 서빙해 주었다. 


  30분이든 한 시간이든 버스를 기다리며 그 답답한 터미널에 구겨 앉아있고 싶지 않았다. 3유로면 이런 쾌적한 바에 앉아서 틴토 베라노를 즐기며 여행자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데.   

  한 달간의 스페인 여행 일정 중에 생각지도 않았던 포르투갈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리스본행 버스표와 호스텔 예약만 해두었을 뿐이고, 다른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지 모르겠다. 


  한국을 떠나올 때 비행기 옆 자리에 서로 친구로 보이는 두 청년이 앉았었다. 바로 옆 친구에게 스페인에 가는 거냐고 물었더니, 리스본에 간단다. 

  아, 리스본! 리스본은 어쩐지 그냥 ‘런던’, 그냥 ‘마드리드’ 등과는 달리 왠지 신비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주연한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영화 제목 때문일까? 

  구성이 좀 복잡해서 따라가기 좀 힘든 영화였는데, 그래서 더 그런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에너지 관련 학회에 간다고 했다. 리스본에서 학회라... 근사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예정에 없던 그 리스본행 티켓을 들고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버스가 세비야를 벗어난 지 30분쯤 되었을 때, 눈앞에 전혀 새로운 교외 풍경이 펼쳐졌다. 드넓은 초원과 이국적인 나무들, 낮은 산등성이들이 차창으로 스쳐간다. 난 속으로 내내 감탄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지루한지 모르고 몇 시간을 계속 갔다. 



달리는 차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라 필터를 사용한 사진들처럼 부드러운 느낌과 색감이 좋다.









  그런데 이 버스는 중간에 휴게소에 들르기는 하나? 설마 화장실 갈 시간도 안 주고, 7시간 내내 가는 건 아니겠지? 버스가 더러 정류장에 멈춰 승객들이 타고 내릴 때, 몇몇 승객이 내리는 것은 분명 아닌데, 어딘가를 다녀오는 것 같았다. 그게 버스 안의 화장실이었던가 보다.


  서너 시간 후에 버스가 정차하고 기사가 뭐라 말하며 손가락 몇 개를 펴보였다. 15분 정차한다는 건가? 결국 버스는 그곳에서 30분이나 정차했다. 15분과 30분을 나타내는 손가락 모양은 전혀 연관성이 없었는데, 난 왜 그렇게 짐작했을까? 


  사람들이 버스 안에서 스낵을 먹기에, 나도 세비야에서 사두었던 파이를 꺼내 조금 먹었다. 그러나 안에 무슨 고기와 야채가 들어 있고 짭짤한 게, 이건 빵이 아니라 그냥 음식이다. 

  버스가 정차한 곳에서 그 개운치 않은 입맛을 지울까 하고 다른 빵을 하나 샀는데, 아뿔싸! 그것도 좀 전에 먹은 것과 비슷한, 다른 버전의 맛이었다.     


  버스 여행 막바지에 대책 없이 졸음이 쏟아질 때가 있었지만, 여전히 풍경이 아름다워 다시 눈이 뜨이곤 했다. 시간상으로 거의 도착할 때가 됐지 싶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바다가 나타났다. 그것도 차도 바로 옆에 거의 수평으로, 출렁이는 물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에. 20-30분만 더 일찍 왔더라면 혹시 노을까지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바다를 달리는 버스


  바다 저 너머에 어렴풋이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스본이다! 버스는 바다를 따라 달려서 그 도시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렇게 만난 리스본은 영화처럼 매혹적이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리스본에 들어서서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난 그 도시에 내 나름의 상상을 덧입힌 채 미소를 띠며 즐겼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어느 쪽이 호스텔 가는 방향일까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지나가던 정장 차림의 중년 신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뭘 도와줄까?”라고 묻는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호시오 역 방향을 묻자, 마침 가던 방향이라며 나와 함께 걸었다. 동생이 서울에 살고 있어서 한국에 가본 적이 있다며,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지하철역에서도 표 끊을 때 어떤 여자의 도움을 받아보았던 터라 리스본 사람들이 영어를 잘한다고 했더니, 포르투갈에서는 중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때문에 대부분 영어를 잘한다고 했다. 서울 사람들도 영어를 잘하더라고 했다. 그렇게 친절한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호스텔이 있는 호시오역 건물에 도착했다.



위층에 호스텔이 있는 호시오역


  리스본에 대한 첫인상은 이래저래 아주 좋았다. 환한 조명 아래 고풍스러운 역 건물이 화려했다. 이곳 이층에 호스텔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호스텔 라운지는 널찍하고 테이블과 의자, 소파, 해먹, 소파 침대 등으로 구성된 작고 안락한 공간들이 군데군데 마련되어 있었다. 


  난 리스본의 밤을 돌아보고 싶어, 요기도 할 겸 밖으로 나왔다.

  역 건물 앞에서 길을 건너면 광장이 있고, 가운데쯤에는 조명이 켜진 예쁜 분수대가 있었다. 

 




  그 길목의 어느 디저트 카페에 들어갔다. 메뉴판의 사진에서 호박죽 푸딩 같아 보이는 것을 가리켰더니 패션푸르트로 만들었다고 한다. 웨이터가 서빙해 주면서 말했다.

  “맛이 아주 좋아요.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과연 상큼하고 신기한 맛이었다. 순간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며 혼잣말을 한다.     

  

  ‘리스본, 모든 게 완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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