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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Sep 06. 2021

여행 중 수상쩍은 느낌이 들 때는
다 이유가 있다.

- 리스본, 포르투갈



  오늘은 집에 돌아가고 싶다. 얼굴과 팔다리가 많이 그을린 데다 피부도 거칠어지고 머리도 푸석하다. 종일 걸어 다니는데 허리며 배 둘레는 마치 부풀어 오른 듯 군살이 붙었다. 매일 이렇게 많이 걷는데도 살이 찌는 걸 보면, 먹는 양이 많은 걸까? 


  눈에 보이는 대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운동장보다 큰 광장이 나오고 그 끝에는 바다가 있었다. 


 





 너무 넓고 뻥 뚫린 광장은 지루하다. 바다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골목으로 돌아가, 언덕으로 난 길을 올라가 보았다. 올라가는 길목에는 볼거리도 많았고, 한참을 올라가면 바다와 리스본을 조망할 수 있는 작은 전망대도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막 신나는 구경은 아니어서 발걸음이 터덕여지고 지친다. 너무 목적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걷고 있어서일까? 그래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리스본의 풍경은 아름다웠고 성곽이 있는 윗마을도 그렇게까지 피곤하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즐길만한 곳이었다.







 



공원에 비둘기 대신 공작들이


  호스텔에 돌아와 기운을 좀 차리고 나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제 리스본의 샹젤리제라고 하는 거리를 걸어볼까. 그 거리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흑갈색 피부의 남자가 사진을 찍고 있다가 내게 말을 걸었다.

  “사진 한 컷 찍어줄래요?”

  “그래요.”


  내가 두어 컷의 사진을 찍는 동안 그는 계속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포르투에 사는데 리스본에 출장 왔다고, 티셔츠 디자인을 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커피 한 잔 함께 하겠느냐고 했다. 뭐 어쩌겠냐 싶어서 함께 커피를 마시러 갔는데 왠지 느낌이 이상하다. 


  난 커피 대신 오렌지 주스를 시켰다. 그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뭐라 뭐라 얘기를 한다. 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혹시 그가 내 음료 안에 뭘 타지는 않는지 눈을 떼지 않았다. 사실 애초에 커피가 아닌 주스를 시킨 것도 만일의 경우 약을 타면 밝은 색이니 보이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이유였다. 누가 약에 색깔이 있다고 하기라도 했는가 말이다. 


  그는 휴대폰에 있는, 자기가 디자인했다는 셔츠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더니 근처에 자기 샵이 있는데 구경해 보겠느냐고 했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자고 했다. 대로변을 따라 걷는 내내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가 민망해할까 봐 그냥 따라가면서도 꺼림칙했다. 실제로 값비싼 셔츠 매장 건물 필로티를 통과하더니,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이게 아니다 싶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요. 그냥 갈래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그를 뒤로하고 돌아 나와 버렸다. 이건 분명히 여자 여행자를 유인하는 수법임에 틀림없다. 뭔가 조금이라도 찜찜할 때는 자기의 본능을 믿어야 한다. 


  15년 전 파리에서도 건축가를 사칭하는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그때 그는 자기 스튜디오를 구경하겠느냐고 했었다. 여행 전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에 바로 끊어낼 수 있었다. 그때의 그 낡은 수법이 다른 버전으로 지금도 쓰이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샹젤리제 거리를 거닐어보려던 계획은 불쾌함만 남기고 불발되었다. 발길을 돌려 에펠탑을 설계한 사람이 만들었다는 탑 위에 올라가 리스본을 조망해 볼까 하고 그쪽으로 갔다. 그러나 한참 길게 늘어선 줄을 보자 의욕이 꺾여버렸다. 

  호스텔 맞은편의 또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더니 그곳도 식당가였다. 길 한복판에서 노래와 춤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골목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 피곤한 하루를 마감했다. 결국 오후에 계획했던 리스본 샹젤리제 산책, 타워 조망, 체리주 마셔보기는 모두 유야무야 되어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큰 마트가 있어서 포르투 와인 작은 병 하나를 1.2유로에 샀다.  저녁에 호스텔에서 마셔야지 했지만 그냥 라커에 넣어둔 채 열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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