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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Sep 07. 2021

동네 마실 나간 것 같은 하루

- 포르투

     


  이제 아주 느긋하게 8시에 일어난다. 샤워하고 조식 먹으며 환담하고 꿈지럭거리다 11시 30분쯤 옷을 입고 나섰다. 여행에 이력이 붙었나 보다. 오늘은 크루즈를 해 볼 생각이다.  표를 사고 기다리는 동안 한 여자가 강가에 앉아 햇빛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아, 나도 그쪽에 지도를 깔고 앉았다. 


  지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웃음소리, 갈매기 소리, 그리고 거리 악사들의 연주 소리가 크지 않게 서로 조화를 이룬다. 강 위에 부서져 반짝이는 햇빛, 물빛, 하늘빛, 포르토의 주황빛 지붕들. 그것들을 즐기는 동안 시간은 금방 흘렀다.     






  말이 크루즈이지 배는 아주 작았고 사람들이 가까이 붙어 앉을 정도였다. 날이 서늘해져서 난 걸쳐 입을 옷을 두 개나 챙겼다. 아니나 다를까, 배의 방향이 바뀌었을 때 거세게 몰아치는 쌀쌀한 바람이 사람들에게 한 겹씩 옷을 덧입게 했다.


  크루즈를 하는 동안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내일 공항으로 떠나는 6시까지 무엇을 할지 생각하느라, 그리고 이제는 눈에 익을 만큼 익어서 새로울 것이 없는 포르투의 강 풍경이기도 해서 크루즈에 집중하지 못했다. 

  배가 방향을 바꾸자 이번에는 바람이 사라지고 햇빛만 남아, 사람들은 껴입었던 옷을 하나씩 다시 벗었고 나도 민소매 차림이 되었다. 여전히 아름답기는 했지만 신기할 것 없는 그냥 평이한 뱃놀이였다.   

 


 


  크루즈를 마치고는 렐리 서점으로 갔다. 이 서점은 조안 케이 롤링이 해리포터를 쓰는데 영감을 주었던 곳이라고 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입장료가 4유로지만, 책을 사면 4유로를 깎아준다고 한다. 이렇게 한가할 때 한번 가봐야지. 책을 안 산다 해도 한 번쯤은 들어와 볼만한 곳이다. 


  거기서 ‘De Lempica’라는 화가의 흥미로운 화집 하나를 발견했는데,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잘 모르는 화가의 그림들은 정말 새로웠다. 난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iffe)’ 화집을 골랐지만, 그 화집이 여전히 눈에 밟혀서 다시 가보니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 남자가 그 책을 골라놓고 있었다. 조금 후회가 됐지만 뭐 조지아 오키프의 책 마지막 장에 있는, 그녀의 사진이 내게 에너지를 줄 것 같아 그 책을 샀다. 


  사진가 스티글리츠가 찍은, 아름다우면서도 강인한 그녀의 젊은 시절 사진들은 늘 내 마음을 사로잡곤 했었다. 책 마지막 장의 사진은 연도를 보니, 그녀가 90세였을 때의 사진이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지만 지팡이를 짚고 꼿꼿하게 서있는, 여전히 당당한 그 모습이 내 노년의 롤 모델이 되어줄 것 같았다.  



90세의 꼿꼿한 조지아 오키프


  

  서점 옆 베이커리 카페에서 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는 커피가 싸지만 양이 너무 적다. 카페를 나와 커피가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어딘가 앉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바로 앞에 벤치가 있고 거리 악사의 트럼펫 연주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맞은편에는 너른 잔디 공원이 있고 그곳에 사람들이 드러누워 있기도 하고 앉아있기도 했다. 그 풍경이 보기 좋아 그쪽으로 옮겼다. 나무 그늘도 꽤 넓어서 안성맞춤이었다. 





  조금 춥긴 했지만 이만한 곳이 없지 싶었다. 나는 한쪽 그늘에 지도를 크게 펼쳐놓고 그 위에 앉아, 허리에 두르고 있던 카디건을 풀어 다리를 덮었다. 

  그곳에서 방금 산 오키프의 책도 보고 여행기도 썼다.     


  그렇게 오후 시간을 보내고 호스텔로 돌아오는데 도중에 길을 잃었다. 날은 어둑해지고 마음이 급해졌다. 인적도 드문데 도로가 건물에서 허름한 차림의 남자들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다. 

  가도 가도 눈에 익은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이대로 호스텔 가는 길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나의 발걸음은 어둠 속에서 초초하게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렇게 두려움과 초조함속에서 어두운 길을 헤맨 끝에 겨우 호스텔로 가는 길을 찾게 되어,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으로 도착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강변 식당가로 나갔다.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하다가 제일 끝에 조금 더 현대적으로 보이는 곳을 골랐다. 







  비쌌다. 좋은 곳에서의 식사인데 뭘 먹을까? 호스텔에서 만난 한국인 걸들이 꼭 먹어보라고 했던 문어요리는 모양새가 이상할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비슷한 가격의 슈림프 파스타를 주문했다. 접시도 아니고 스테인리스 그릇 같은 곳에 나온, 그것도 검은색 파스타여서 좀 실망했는데 의외로 맛이 아주 좋았다. 

  새우와 마늘의 풍미를 각각 살린 데다 쫄깃한 파스타 면까지, 이후로도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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