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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Sep 09. 2021

다시,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알렉스 (2)


  다음 날 알렉스와 나는 자전거 투어를 신청했다. 자전거 투어는 자신이 없었지만 그렇게 힘든 코스가 아니라는 알렉스의 말에 용기를 냈다. 난 어제 알렉스 덕분에 뜻밖의 저녁 식사를 대접받았으니, 오늘 점심을 쏘겠다고 했다. 


  우린 오전엔 시내 구경을 하고, 오후에 자전거 투어에 함께 나서기로 했다. 알렉스는 여행 과정을 비디오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는 일에 몰두했다. 어제부터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난 그가 찍는 브이로그에 내가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지 피해 주어야 하는지 잘 몰라서, 첫 부분 외에는 그가 특별히 요구하지 않은 경우에는 피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나중에 비디오를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동행으로서 적극적으로 촬영에 함께 임할 필요가 있었다.





  






  잘 판단이 안 될 때는 일단 물어봐야 한다. 혼자 생각으로 우물쭈물할 일이 아니다. 그런 나를 상대가 받아들이고 밀어내고는 상대가 판단할 일이지, 내가 지레 움츠러들 일은 아닌 것이다. 다음 여행에서는 그래야지. 

  특히 오늘 자전거 여행 때 그랬다. 동행이 있는 한 남자와 알렉스를 뺀 나머지 멤버는 다 여자였다. 심지어 가이드까지도. 난 그가 다른 멤버들이랑 자유롭게 어울리도록, 부러 그를 외면하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왜?’

  그런 지나친 배려 따위는 이제 버리도록 하자.


  오전에는 고딕 지역과 도심 가운데에 위치한 보케리아 시장을 함께 탐험했다. 둘 모두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시장은 정말 컸고 무엇보다도 팩에 담겨 진열된 색색의 과일들이 시선을 끌었다. 내가 가장 먹고 싶은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제일 구미가 당기는 것이 과일들이다. 빵처럼 생긴 파이도 먹어봤는데 맛은 별로 없었다. 그곳에서 먹어본 음식들은 모두 맛은 없었다.  


  몇 시간이나 걸었을까? 우린 오후에 예정된 자전거 투어를 위해 호스텔로 돌아가 잠시 쉬기로 했다. 난 피곤하면 아무리 좋은 것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조금 걱정이 되었다. 오전에 너무 많이 걸어 발바닥이 아플 지경이었던 것이다. 

  한 시간 정도 잘 수 있는 시간이어서 알람을 설정해 놓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꿀잠을 자고 회복된 나는 알렉스와 함께 씩씩하게 호스텔을 나섰다.


  날이 좀 서늘했지만 용용하게 민소매 티와 반바지를 입고 카디건을 허리에 두른 채 길을 나섰다. 낮잠으로 에너지를 충전한 나의 발걸음은 한껏 경쾌했다. 막상 자전거를 배정받고 보니,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를 뚫고 이들과 함께 뒤처지지 않고 가야 한다는 것이 겁이 났다. 할 수 있을까? 

  나는 안장이 높은 자전거에 적응하지 못해, 일행이 멈춰 설 때마다 매번 비틀거렸다. 반바지를 입은 내 다리는 자전거에 부딪혀서, 나중에 보니 온 다리에 화려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혼자서 녹색 신호를 놓치는 등, 나머지 멤버들에게 자주 민폐를 끼쳤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장정을 마쳤다. 바르셀로나의 도로는 일반적으로 양쪽에 차도가 나란히 있고 그 가운데 한 차선만큼이나 넓은 자전거 도로가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양쪽 차도를 가르며 중앙에 난 길을 자전거로 달리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장관인 데다가 차와 나란히 달리는 짜릿함까지 더해져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더구나 우리가 지나는 그 구간은 바다를 향해 뻗은, 약간의 경사가 있는 내리막길이어서 그 시원한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근사했다.







  지금도 눈앞에 그 풍경과 그때 느꼈던 흥분이 잔영처럼 어른거린다. 난 알렉스가 대신 등록해 준 자전거 투어비도 갚고, 다음날 쓸 택시비와 약간의 용돈도 필요했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500유로짜리 고액지폐를 바꿔야 했다. 

  그런데 은행마다 지폐 교환을 거절했다. 결국 자전거 여행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그 고액지폐를 받아주었다. 


  식당에서 우린 5가지의 다양한 타파스와 맥주를 시켰다. 내가 시킨 연어 회는 알렉스가 못 먹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도 별로였지만, 알렉스가 고른 세 가지 타파스는 아주 훌륭했다.

  난 종일 알렉스에게 가벼운 먹거리를 사준 셈이었지만, 저녁 또한 내가 샀다. 조금 과한 면이 있고 그도 사양했지만, 내 여행의 마지막 이틀을 이렇게 값지고 다채롭게 해 준 그에게 이 정도는 아깝지 않았다.


  “그래 한국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그가 물었다.

난 딸들이 있다고 했다. 딸들은 몇 살이냐고 해서 22, 20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란다. 혹시 일찍 결혼한 거냐고 해서 아니라고, 서른 넘어서 큰 애를 낳았다고 하자 그는 경악한다. 그렇다면 자기 숙모인 리즈나 제인과 10년 차이밖에 안 난단 말이냐며. 

  그랬다. 이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 나이에 혼란을 겪곤 한다. 나 또한 그런 나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호스텔로 돌아오는 길에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고 알렉스가 물었다. 난 최근에 본 “Eat, Pray, Love”가 좋았다고 했다. 자아를 찾아 여행을 떠난 한 여자의 얘기라고. 

  “그 영화에서 무엇을 배웠는데?”

  “새로운 나를 찾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비워야 하는 것 같더라.”

  “비우는 것에는 자기가 가진 것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되는 것 아닐까?”


  그가 어떤 의미로 그 말을 했든, 나는 이 여행에서 내가 자신에 대해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내 나이를 물을 때마다 답을 피하고 싶었던 이유. 피할 수 없어서 얘기하고 났을 때, 스스로 위축되어 저만큼 뒤로 물러나버리곤 했던 것. 


  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 다른 나의 모습보다도 가장 크게 나이를 보고, 그 나이로 나의 나머지 모든 부분을 규정하고 판단해 버릴 것이라는 것. 그래서 다양한 나의 모습 가운데, 53세의 중년을 넘긴 여자라는 낙인만을 보게 되리라는 것. 이것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 나의 남은 과제인 것 같다.


  서양인들의 눈에 앳되어 보이는 나의 외모가 나이 든 나의 정체성을 배반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이 어린 배낭 여행자들과 마주치면서 그들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53세라는 물리적인 나의 정체성을 배반하고 있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그렇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외모를 빌어 가장함으로써, 나의 정체성을 배반하고 있는 것일까?


   물리적인 나이와 외모가 늙고 변해가도, 그 안의 아직 파릇하게 생동하는 마음이나 감정, 생각 등은 그대로여서, 나이가 들수록 그 괴리감은 커지기 마련이다. 내 안의 나는 여전히 그들만큼 어리거나 젊어서, 꾸미려는 의도 없이도 그냥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고, 마침 외모가 비교적 젊어 보여서 사람들이 멋대로 판단하는 것일 뿐, 나 스스로 속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속도록 내버려 두면서 용이하게 그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혜택을 누릴 뿐이다.   

  

그런데 직접 나이를 물으며 치고 들어올 때면,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당황하여 움츠러들게 되는 것이다. 그 간극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내 나이를 당연하게, 당당하게 밝히고, 설사 사람들이 나이에 대한 편견을 갖고 나를 바라보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 있게 내 안에서 파닥이는 나를 드러내는 것. 그것이 답이다. 나와 여행의 한 순간을 즐겁게 공유했던 이들은 내 나이를 알게 되었지만 그들이 그것에 신경이나 썼던가?


  나와 마주치는 여행자들이 몇 분, 하루 또는 며칠 동안 나를 보게 되더라도, 짧으면 짧은 대로 그만큼 의미가 덜 할 테니 상관없고, 길면 긴 대로 그만큼 나에 대해 알게 될 테니 그 또한 상관이 없다. 

  결론이 나왔는가? 그러면 그 결론대로 하면 된다. 나이를 물으면 망설임 없이 말할 것,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말하고 나서 절대로 움츠러들지 말 것.


  호스텔에 돌아와 알렉스는 그날 찍은 비디오를 편집하기에 바빴고, 나는 샤워하고 내 이층 침대로 올라가기 전에 알렉스에게 미리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 날 일찍 공항으로 떠나야 해서, 내가 떠날 때쯤 그는 자고 있을 것이므로. 나는 우리가 페이스 북을 통해 서로 뭘 하는지 볼 수 있을 것이고, 너는 5년 내에 내가 쓴 책을 보게 될 거라고 했다. 그는 그 책 꼭 한 권 보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알렉스와 나는 다정한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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