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파크를 보러 갔다가
캐나다 플레이스를 만나다

- 밴쿠버

by Annie



위니펙까지 가는 비행기에서 옆에 앉은 남자와 얘기를 나누었다. 톰슨 북쪽 지역에 있었지만, 지금은 폐광이 된 광산의 폐기 작업을 하고 있으며, 집은 위니펙에 있다고 했다. 폐기 과정을 마무리하는데 무려 7년이 걸린다고 했다.

그 시간 승객의 대부분은 남자였던 것이, 아마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외지에 사는 사람들인 것 같다.


위니펙에서 밴쿠버로 오는 비행기에서는 옆에 중국인 유학생이 앉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위니펙의 한 대학으로 유학 왔고, 1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에 가기 위해 밴쿠버 공항으로 가는 길이었다. 너무 어려서 별 이야깃거리는 없지만 예의 바르고 반듯했다.

여기서 내가 써놓고도 약간 의문이 드는 것은 ‘너무 어려서 이야깃거리가 없다’는 부분이다. 어린 사람들은 어린 사람들을 만나면 공감대가 형성되어 많은 얘깃거리가 있을 것이다. 20대는 20대 대로, 30대는 30대 대로. 그렇다면 역으로 20대 초반의 여행자들이 50대인 나와 얘기하고 싶을까?


나는 그들과 이야기하기를 바라면서 열아홉 살 대학 1학년생과 이야깃거리가 없을 거라고 단정하다니. 나는 경계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이 나를 경계 없이 대해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한 자락 깔고 들어가서 그에게 별 기대를 않고 있다니.


이것은 실제로 여행 내내 마주친 젊은이들을 대하면서 마음 한구석 갖고 있었던 나의 한계이기도 했다. 그래서 내 나이 또래는 아니더라도 위아래 10년 정도까지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혼자서 여행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보통 패키지여행을 하고 남자들은 가족들 먹여 살리기 바쁘고, 아니면 가족 여행 팀이다. 여하튼 상대가 10대이면 내가 10대의 눈높이로 내려가면 된다. 그래야 이야깃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드디어 밴쿠버 공항에 도착했다. 시내로 진입하는 버스는 없고 대신 지하철이 있었다. 시티센터에서 내려, 도보로 6분이라고 했으니 도로 이름을 확인하면서 구글맵을 따라갔다.


'어! 이거 풍경이 톰슨과는 딴판인걸!'


거침없이 뻗은 빌딩들 사이에 미끈한 내리막길이 나있어서 캐리어를 밀기도 쉬웠다. 화사한 빛깔의 정장을 입은 날렵하고 잘생긴 남자들이 휙휙 지나갔다. 그냥 잡지에서 튀어나온 모델들 같았다. 왠지 드디어 캐나다를 보게된 느낌이다.


그런데 구글맵이 이상하다. 분명히 이 방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좌회전 후 다시 우회전, 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구글맵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땡볕에 끝도 없이 돌고 돌아 겨우 호스텔 근처까지 왔다. 구글맵이 없을 때보다 덜 고생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막막한 기분은 덜 했다. 거의 왔으니 정신을 좀 차렸다 가자. 체크 인 시간도 아직 남았으니 싶어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와 스콘을 먹으며 지친 심신을 달랬다. 긴 헤맴 끝의 이 여유. 카페 유리창 밖으로 나이 지긋한 걸인이 모자를 앞에 놓고 앉아 있다. 행인들이 인사하며 지나가기도 하고 돈을 넣어주고 가기도 하는데, 한국에서 보는 풍경과는 많이 다르다.

사람들은 마치 이웃 노인을 본듯 웃기도 하고, 때론 'sorry' 하면서 영역을 침범한 듯 미안해하며 비켜 가기도 한다. 어쩐지 걸인조차도 존중하고 존중받는 분위기다. 마음속으로는 경멸하거나 값싸게 동정할까? 그래 보이지는 않지만 설사 그럴지라도 한국에서처럼 대놓고 벌레 보듯 하거나 무시하지는 않는다.


체크인 후 스탠리 파크를 찾아 나섰다. 리셉션에 물어보니 25분 정도 걸으면 된다고 하는데, 내가 다다른 곳은 수많은 요트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였다. 거기도 공원처럼 보였고 조깅이나 산책하는 사람들, 잔디에 누워 쉬는 사람들, 개를 데리고 나와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항구를 따라 호화로운 아파트와 호텔들이 즐비했고 강처럼 보이는 바다 풍경이 아늑하고 깔끔했다. 계속 걷다 보니 그 길은 저 너머로 보이는 스탠리 파크와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 많이 걸은 데다, 스탠리 파크는 하루에 돌기에도 벅찰 만큼 큰 곳이라니, 다음날 보기로 하고 그냥 그곳 벤치에 앉았다.



코울하버.JPG




항구.JPG



항구 선착장이 바로 앞에 보이는 잔디 공원이었다.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남자들이 더러 있었는데 그들이 오가는 것을 무심히 흘려보며 난 새삼 정우의 존재에 감사했다. 비록 옆에서 함께 여행하지는 않지만 그의 존재가 어디를 가든 외롭지 않게,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했다. 마침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게 보여주고 싶은 시가 있다고 했다. 너무 쑥스럽지만 웃지 말라며.


너는 달이었어.

늘 그랬지. 그리고 그는

늘 거기서

너를 빛나게 해 주었지.


“그는 해님이었나요?”

“아니란다, 애야, 그는 어둠이었어.”


난 그 시가 좋았다. 정우는 계속 말했다.

“너 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난 널 더 빛나게 해 주지. 널 주저앉히거나 작아지게 하는 대신에, 너 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나와 함께 있으면 넌 마음껏 빛날 수 있어. 그리고 실제로 넌 그렇게 빛나고 있어. 네가 가고 나서.. 난 그냥 어둠이야.”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언어의 마술사다. 때로는 그것이 신기루 같아서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 같기도 하지만 매번 나를 매혹시키곤 한다.


해안을 따라 나있는 긴 산책로를 걸어가니, 그 끝에 캐나다 플레이스가 나왔다. 밴쿠버의 랜드마크 같은 곳이다. 난 내가 특별한 감흥을 갖고 머물렀던 이 일대 전체를 '캐나다 플레이스(Canada Place)'로 간주하고 이렇게 마무리했다.

“스탠리 파크를 보러 갔다가 캐나다 플레이스를 만났다”



1175.jpg '캐나다 플레이스(Canada Place)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벤치에 앉아있었던 그곳은 코울 하버(Coal Harbor)였다. 돌아오는 길에 큰 마트가 있어서 바나나 한 손과 코타즈 치즈, 물과 체리 파이 반 조각을 사서 돌아왔다. 이곳에 머무는 며칠 동안 내 식량이 되어줄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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