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빌 아일랜드를 혼자 걷다

- 캐나다, 밴쿠버

by Annie


느지막이 호스텔을 나서 그랜빌 아일랜드로 향했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두 정거장 지나서, 크고 긴 다리만 건너면 되는 가까운 곳이었다. 이곳 버스 기사들은 참 친절하다. 물론 한국처럼 대중교통이 바쁘고 혼잡한 상황이 아니라서 사람들을 모두 느긋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삶 자체가 그리 팍팍하지 않아서 가정에서도, 직장 상사들로부터도 스트레스를 덜 받는 분위기라서, 일도 그렇게 느긋하게 즐기듯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호구지책으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관광객들을 포함한 승객들을 돕고 있는 것이며, 승객들도 그것에 고마워하고 있다는 마인드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버스도 승객들이 타기 쉽게 인도가 차도보다 약간 높아서 버스 내부와 딱 평행한 높이라, 캐리어를 든 여행자들조차 어려움 없이 타고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지난번 갔던 스페인, 포르투갈, 암스테르담도 모두 그랬다. 한국은 그게 안 되나?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다리를 막 건넌 후에 버스에서 내리자, 나도 내려야 하는 건가 하고 머뭇거리는데 기사가 그들을 향해 물었다.

“누가 여기서 내리라던가요? 다시 타세요. 어디서 내릴지 알려줄게요.”

그러자 관광객들은 계면쩍게 웃으며 돌아와 고마워했다. 몇 정거장 후, 기사가 그들에게 여기서 내려 걸어가면 된다고 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 내려서 그중 한 명에게 어디 가는 거냐고 물었다. 특별히 어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돌아다닐 거라고 했다. 나랑 똑같군. 그들을 따라갔더니 아무 정보 없는 내가 가야 할 길이 바로 나왔다.

내가 아는 정보라고는 안젤라가 얘기했던 갤러리와 샵들, 시장, 아름다운 항구, 그런 것들이었는데 바로 그 모든 것들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맨 처음 들른 곳이 아트 갤러리였는데 전시된 작품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돌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었는데, 생활 장식품으로 두기에도 적합한 것들이었다. 다만 값이 엄청 비싼 예술 작품들이었다.

갤러리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더니 주인이 아주 좋아하면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아, 자기도 가봤다고, 제주도에 갔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섬이었다고 반가워했다.


바로 옆에 있는 갤러리는 고급스러워 보여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하나 망설여졌는데, 그곳에는 캐나다 원주민들의 전통 예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지나가던 관광객이 친구더러 이 갤러리 유명하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난 전통 예술보다는 모던한 것이 더 좋았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도 이해가 필요한 그 나라의 독특한 문화나 전통, 역사보다는 그냥 즉각적으로 와닿는 풍경이나 사람, 음식, 즐길 거리 등에 크게 반응하는 아주 단순한 여행자이다.



갤러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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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기념품 가게들이 거리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조금 더 걸으니 시장이 나왔고, 각종 먹거리들이 즐비했으나 딱히 싸지는 않았다. 시장을 통과하면 페리 터미널과 요트 항구, 그 앞의 광장과 계단에는 관광객들이 넘쳐 났다. 햇살이 너무 따뜻하고 바람이 너무 부드러워서,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그곳에 앉아 있기만 해도 좋았다.

펍에 들러 14달러에 피시 앤 칩스와 맥주를 제공한다기에 시켰다. 피시는 한 조각만 나왔는데 입에서 살살 녹았다. 딱 일 인분으로 내게 적당한 양이었다. 칩은 한국에 있는 외국인 식당만 못했다.


길을 따라 아트샵들이 있었고, 제품들은 다소 고급스럽고 비싼 편이었다. 예술가들의 작업실인 모양인데 이런 거리에 이 정도의 샵과 작업실을 가지려면 꽤 돈 많은 작가 들일 것 같다.

그 거리를 조금 벗어나니 잔디 동산 같은 것이 있어서 올라가 벤치에 앉았다. 오는 길에 봐 둔 카페가 예뻤지만, 이런 곳에 카페가 있다면 전망이 너무 좋을 것 같아 그냥 테이크 아웃 커피를 사들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조정.JPG 호수 건너편은 고급 주택가


호수를 따라 둥그렇게 긴 산책로가 나있었고, 그 긴 길을 걷다가 근사한 주택가를 만났다. 톰슨하고는 너무 다른 분위기의 밴쿠버는 캐나다의 부를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었다. 이렇게 한적하고 좋은 주택가에 살면 행복할까? 지루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택가이지만 주민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해안을 따라 난 산책로에만 드물게 조깅하는 사람들이 보일 뿐이었다. 너무 조용해서, 선진국에서의 안정된 삶이 딱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걷다 보니 길은 끝이 없고 돌아가기에도 너무 멀리 와버려서 난감했다. 돌아갈 땐 페리를 타고 예일 타운에 갈까 했는데 페리 선착장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서 포기했다. 가까이에 버스 정류장이 보여서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호스텔에서 내일 카필라노 숲 탐험과 서스펜션 브리지 투어를 예약했다. 아침 아홉 시까지 다른 호스텔에 집결해야 한다. 저녁 먹은 후 라운지에서 파블로와 마주쳤다. 그는 한 잔 하러 나가는 길이라고 했다. 함께 가겠느냐고 했지만 난 내일 아침 일찍 산행이 있어서 안 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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