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여행자끼리

- 캐나다, 빅토리아

by Annie



오늘은 날이 흐려 엠프레스 호텔 주변도 그 환한 빛이 다소 사그라진 느낌이었다. 어디 카페에 가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셨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눈에 띄는 카페가 없다.

와프 입구에 거의 도착해서 저 너머 도로 쪽을 보니, 어렴풋이 카페 간판이 보이는 것 같다. 이렇게 반갑고 고마울 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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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아담하다. 엠프레스 얼 그레이를 시켰다. 향이 좋다. 난 창가의 오붓한 2인석을 차지하지 못해, 그냥 장기판이 놓인 긴 테이블 한쪽 끝에 앉았다. 다른 쪽 끝에는 중년의 여자가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멀리서 창가의 2인석을 보니, 창 프레임과 바깥의 나무, 그 앞에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어우러져 그림처럼 예쁘다. 사실 그곳에 앉은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실제로는 여기서 바라보는 그 자리가 더 예쁘다.


사람들 사는 모습도 그와 같을지 모른다. 겉에서 봤을 때는 보는 사람 눈에 비친 모습이 그들의 모습 같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잘 모른다.

설사 안다 해도 보이는 것과 실제의 삶은 또 전혀 다를 수 있다. 누가 알겠는가?


얼 그레이가 한 주전자 나왔다. 벌써 세 잔째다. 그런데 졸린다. 이곳 카페는 주로 동네 사람들이 오나보다. 와서 장기도 두고 카드놀이도 하고 모임도 갖는 것 같다.

카페 한쪽에 있는 열린 공간에는 그리던 그림 같은 것들도 있었고, 회의실처럼 크고 긴 탁자와 의자들이 중앙에 놓여 있었다.

얼 그레이 한 주전자에 2,000원. 싸기도 하고 한가로운 게 딱 좋다.


항구가 바라다 보이는 벤치에 혼자 앉아서 많은 이들을 그리워한다.

바다 위로 수상비행기와 페리 택시가 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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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7.jpg 비싼 영국식 티를 즐길 수 있는 곳


빅토리아에서 3일째 혼자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조금 걷다가 벤치에 앉아있는 나이 든 여행자를 보았다. 여행 중 어디선가 그녀와 마주쳤었고, 그녀가 내게 뭔가를 묻기도 했었다. 조금 당황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약간 불안정한 모습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이도 지긋한데 혼자 여행하는 것 같아 말을 걸었다.

그녀는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독일에서 왔고, 이곳 빅토리아와 영국, 메르켈을 싫어했다.

빅토리아는 고유의 정체성이라곤 없는 하이브리드 같은 곳이고, 식민 시대 영국의 흉내를 내고 있지만, 그것도 우습다고. 국회의사당의 유치한 조명이며 길거리를 활보하는 마차들을 보라고. 여행자들을 현혹시키는 얄팍한 영국식 상술이 빅토리아를 웃기는 곳으로 만들었다고.


거대하고 끔찍한 호텔들만 즐비하고 해안가에 늘어서 주택단지들이 고작인 이 항구 또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고. 이 해안의 역한 냄새가 느껴지느냐고. '피셔먼스 와프'에 가봤느냐고.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그곳에서 음식들을 팔고 있다니. 자기는 도저히 그런 데서 뭘 사 먹거나 할 수 없다고 했다.



1105.jpg 피셔먼스 와프


피셔먼스 와프 주변은 냄새가 나긴 했다. 난 그래도 거기서 아주 맛있는 피시 앤 칩스를 먹었는데...

나 같은 아시아 여행자의 눈에는 빅토리아가 그런 시각으로 보이지 않고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는데, 유럽인에게는 또 그렇게 보이기도 하나보다.


사실 그녀의 말은 상당 부분 옳기도 했다.

빅토리아는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보다는, 나 같은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관광 인프라로 반짝이는 곳이긴 하다. 애초에는 고요하고 아름다운 바다를 자산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또 자기 나라 수상, 메르켈을 끔찍해했다. 메르켈은 독일이 미국처럼 되어야 한다는 듯이 말한다고. 최근의 연설을 들어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고. 이민자들에 대한 그녀의 정책도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대단히 신랄했다.


한국에서는 난민들에 대한 독일의 수용정책 등에 대해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상당히 높이 평가하는 편인데, 정작 그 부작용들을 가까이서 체험하는 독일인들은 무척 못마땅해하는 것 같다. 스페인에서 일주일 동안 함께 여행했던 독일인 재스민도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로키에도 가봤다고 해서 거긴 어땠느냐고 물었더니, 정말 놀라울 만큼 아름다웠다고 했다.

그녀는 저녁 먹을 곳을 찾아보자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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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jpg 함께 페달을 밟아 달리는 이것은 무엇?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얘기를 했다. 알고 보니 나와 같은 호스텔에 묵고 있었다. 오랫동안 타이완에서 살았고 치과의사 자격증을 갖고 있으며 중국의 건축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고. 독일어, 불어, 스페인어, 중국어, 영어 5개 국어를 할 수 있고, 지금은 철학 공부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몇 군데의 식당을 들여다보았지만, 다 마음에 안 들어했다. 들어가 본 식당마다 응대하는 직원 누구에게든 불평 비슷한 말을 했다. 오랜만에 나이 든 색다른 말 상대를 만났나 했었는데, 이건 아무래도 내가 코 꿰인 것 같다.

한 군데만 더 들어가 보고 그때도 그녀가 마음에 안 들어하면, 정말 미안하지만 난 그냥 가겠다고 말해야지. 그러나 결국 그러지 못했다. 마침내 한 군데 그녀가 괜찮은 것 같다고 하는 곳이 있었는데, 빈 테이블이 없어서 바에 앉았다.


난 배가 고프지 않아서 음식은 주문 안 하고 맥주만 한 병 시켰다. 몹시 썼다. 그녀는 참치 샐러드와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다. 그러나 와인도 2가지를 시음해본 후에 주문하는 바람에 바텐더는 좀 화가 난 듯했다.

그녀는 참치 샐러드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고, 나와 자신을 위해 와인 2잔을 더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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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엔 영화 ‘Beautiful Mind’의 천재 수학자 내쉬처럼, 그녀가 뛰어난 지능을 가졌지만 정신적으로 약간 문제가 생긴 사람인가 싶기도 했다. 커리어도 훌륭하고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명 냉철한 지성도 갖고 있는데, 어딘지 불안정해 보였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서양 나이로 69세, 우리 나이로 하면 71세였다. 우리 나이로 치면 배우 윤여정보다 두어 살 많은 나이였다.


여행의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내가 물었을 때, 그녀는 사람들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경우가 아니라, 그 지역민들과 커넥션을 갖는 것이라고. 자기가 타이완에서 그랬던 것처럼.

늙었네 하고 방안에 주저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인생이라면, 그게 뭐냐고. 또 호스텔에서 마주치는 젊은 여행자들이 바보들 같다고 했다. 여행 와서는 호스텔 안에서 인터넷만 들입다 쳐다보고 있더라고.


호스텔에 묵는 이유는 호텔에 돈을 써야 할 이유가 없어서라고 했다. 어렸을 때 자기 집은 아침에 먹을 빵을 빵집에 주문해서 한 달에 한 번씩 값을 치르곤 했었다.

한 번은 자기가 빵을 가져오면서 초콜릿 케이크를 하나 끼워서 가져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엄마가 그러셨단다. 꼭 필요하지 않은 것에 돈을 쓰는 것은 낭비라고.


그녀는 와인 두 잔을 더 시켜서 나와 나누어 마셨다. 와인은 자기가 사는 거라고 내게 맥주 값과 팁만 내라고 했다. 길모퉁이에 레스토랑이 하나 있고 창문을 통해 내부의 활기찬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그녀가 말했다. 보라고. 여행에는 저런 활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녀의 말은 일정 부분 옳았고, 일정 부분 모순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지나친 확신은 좀 위험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의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이 잘못된 확신이거나 지나치게 강하면 오류와 독단에 빠지게 된다. 그녀도 그런 면에서 조금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야경을 보면서 조금 더 걷겠다고 함께 가겠느냐고 했더니, 옷이 좀 춥다고 자기는 들어가겠다고 했다. 난 그녀를 호스텔에 들여보내고 다시 혼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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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야경을 본 지점과 각도를 조금 바꾸었다. 항구 쪽에서 연주와 노랫소리,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내가 막 자리를 잡으려고 한 순간 연주는 끝이 나버렸다.


길을 내려오자 거기에는 조그만 야시장이 펼쳐져 있었다. 기념품을 파는 수레들이었다. 향이 좋고 색깔이 예쁜 거품 목욕제 3세트를 10달러에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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