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에게 배우다
지난 반년을 물에 젖은 휴지처럼 살았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한 연한 영혼에 아무리 햇볕을 쬐어도 꼬들거려 비틀거리거나 여전히 축축한 상태를 견뎌야 했다. 손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세고 있던 적도 있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도 있었지만 무작정 시간이 가기만을, 마음이 좋아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가성비가 매우 나쁜 행동이었다. 이럴 땐 의례 하는 습관적인 행동이 있었는데 혼자 드라이브를 한다거나 까슬한 겨울 들판을 찾아 헤매는 것, 혹은 질 좋은 추리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거였지만 이제는 그것조차 힘들어졌다.
문득, 지난해 그림책 수업 했던 일이 떠올랐다. 모임에서 함께 나누고 싶다고 했던 작품, 이순옥 작가가 쓰고 그린 <틈만 나면>이었다. 왜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내가 이렇게 점점 꺼져가는 것을 보지 못한 생존의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역시 나를 돕는 것은 나 밖에 없다.
이순옥 작가 그녀가 궁금해졌다. 어쩌다 그녀는 순한 연필로 구석에 존재하는 사람의 말로 언제 뽑혀도 이상하지 않은 ‘잡초’나 자연만이 돌보는 ‘들꽃’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성과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자본주의 시대에, 오로지 돈과 성공만이 ‘잘 살았다’의 기준이 되는 지금에 틈만 있으면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는 생명에 마음을 쏟은 그녀가 참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풀’ 일명 잡초라고 불리기도 하는 단어는 초본식물을 통틀어 하는 말이라고 한다. 일찍이 철학자 윤구병 선생은 『잡초는 없다』는 책을 통해 인간이 풀이라 부르는 잡초는 초식동물의 식량이 되고 약초로도 쓰이며 사실 자연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쓸모없는 것은 없음을 변산에서 공동체를 이뤄 농사를 지으며 삶으로 보이고 있다. 그러니 풀은, 혹은 잡초는 인간이 만든 싸구려 편견인 셈이다. 사람이 말하는 쓰임과 용도에 관계없이 풀은 자기들이 어떻게 불리든 죽은 듯이 겨울을 나고 봄 햇볕이 왔다 싶으면 세 계절을 살아낸다. 문명이 그들의 땅을 만들어주지 않아도 틈만 있다면 어김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뿌리를 내린다. 한 줌의 흙과 하늘만 있다면.
이 가열차고 치열한 생을 작가는 예리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특별히 부드러운 연필로 그린 스케치는 마음에 생긴 구멍 난 상처를 메꿔주는 듯이 은혜로운 가루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연필화가 영혼의 빨간약이 되는 순간이다.
주인공이 아니어도, 멋진 곳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작가의 위로는 그저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저 틈만 나면 무럭무럭 자라는 용맹한 풀과 함께 ‘존버’하자고 나에게 속삭이고 있다. 수면제도 몇 차례 받은 정신분석도 소용없이 그림책 한 쪽이 나를 햇빛에 말리고 있다.
소멸해가는 자신이 안타까웠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눈은 흐려지고 허벅지의 근육은 성실하게 빠져나가고 부모님은 나이 듦은 눈에 띄게 표가 나고 반평생 꾸준히 한 것이 커피 홀짝거리며 책 몇 권 읽은 게 전부인 나의 삶이 갑자기 불쌍해 진 것인지도 모른다.
‘덧없다’를 잘 통과하면 인생 감정의 마지막 공부와도 같은 ‘성숙의 환멸’을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작품 속 풀처럼 여전히 밟히고 뽑히고 녹아내릴 것이다. 이곳은 만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그럼에도 틈만 있다면,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다면 다시 몇 줌의 햇살과 바람과 빗물로 태어나 보는 거다. 갑자기 기운이 나네! 인생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