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기분을 흡수하는 사람

by lucy

온 동네를 주름잡고 놀러 다니던 초등학교 2학년, 이제부터 엄마라 소개받은 분과 무심한 아빠와 함께 조금 시골에서 지내게 되었다. 나와 동생은 서울 할머니네서 천방지축으로 지내다 갑자기 긴장되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때의 공기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분이 조금 불편했던 것 같다. 그분은 작고 단단하고, 조금은 차가워보이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손재주가 좋아서 뜨개질로 옷도 직접 만들어주시고, 지점토 같은 걸로 꽃 같은 것도 잘 만드셨고, 도시락도 예쁘게 싸 주셨던 것 같은데도 그때를 생각하면 긴장되던 시간들이 먼저 다가온다. 평소에도 잘 웃지 않았던 그분은 가만히 있을 때 조금 화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그분의 그 표정을 보는 게 싫어서 내내 표정을 살피고 기분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가끔 웃으실 때는 나까지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으니까, 어쩌면 그분을 꽤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아빠는 안 계셨고, 셋이 조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웃음이 많이 오가던 날, 그분은 짜장면을 시켜 먹자 했고, 나는 너무 행복했다. 짜장면보다 그 분위기가, 평범한 집안의 여느 가족 같은 분위기가 나를 들뜨게 했었다. 기다리던 짜장면이 왔고 상을 준비하면서 내가 한 말 때문에 그 좋았던 분위기는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그분 얼굴에서 웃음기는 사라졌고, 나는 영문도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기다리던 짜장면은 무슨 맛인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맥락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엄마가 그때 성질내셔서, "라고 신나게 말했고, 나중에야 '성질'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무안하고 슬펐다. 그즈음부터 밖으로 말을 뱉기 전에 속으로 말을 고르는 버릇이 생겼다. 그분이 아빠와 헤어진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그분의 표정이 곧 나의 표정이 되었다. 나의 기분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표정을 먼저 살펴야 했다.


백군은 꽤나 괜찮은 남편이다. 다정하고 성실하고 책임감도 있다. 요리도 잘하고 심지어 식사 준비는 거의 다 도맡아 한다. 불만을 가질 수가 없는 남편이지만 그런 백군에게도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본인의 상태에 따른 기분변화의 폭이 굉장히 크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잠을 잘 자고, 맛있는 걸 먹고, 여유가 있고, 컨디션이 좋으면 미친 듯이 다정하고 춤을 추고 애교를 부린다. 반대로 잠을 못 자거나, 배가 고프거나, 피곤하면 급작스럽게 냉랭해진다. 처음 그 냉랭함을 접했을 때 나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내가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이 친구는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나도 기분이 같이 다운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십 분만 자고 일어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혼자 쌩쌩해졌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기분전환이었다. 나는 백군이 그럴 때마다 자꾸만 배신감을 느꼈다. 아무리 신경 쓰지 말자고 스스로를 타일러도 그게 어려웠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의 기분을 흡수해 버리는 사람이니까.


오늘도 백군은 기분이 좋다가 혼자만의 이유로 다운된 것처럼 보인다. 방이 어지러워 일수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수도, 배가 아플 수도, 졸릴 수도, 심지어 자기도 모르는 피곤함일 수도 있다. 나는 그 기분에 전염되기 전에 얼른 스스로를 격리하고 거리두기를 한다. 가까이서 그 기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직 내 내공으로 부족하다.



그분과의 생활로 나는 눈치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눈치가 있으면 꽤 사랑받는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자면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관찰해야 했다. 관찰하다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얼른 그것을 해주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좋든, 싫든 그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오래 함께 있으면 힘이 들었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 가지로 좋지 않았다. 먼저 내 마음을 알아주는 법을 몰랐고, 남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이 지독히 안 좋은 버릇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백군은 대부분 나와 상관없이 개인적인 이유들로 기분이 안 좋아진다. 내 세상에선 피곤하면 오히려 힘을 내고, 졸리다는 이유로 기분이 다운되는 일은 없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다고 믿었다. 반드시 기분이 안좋아질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결혼생활 2년이 넘어갈 즈음 가까스로 피곤해서 저렇게 기분이 다운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인정한다 하고서도 갑자기 백군의 기분이 다운되는 걸 보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래!?'라고 생각하면서 화가 났다.

이제야 스스로 격리하고, '그래, 그건 니 문제지'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래도 아직 쪼오끔 같이 기분이 다운되고 만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 그분도 나보다는 아빠 때문에 그런 표정일 때가 더 많았을 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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