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여자친구가 질투나지 않지만, 문득 얘랑 결혼하면 어떨까 생각하게 만드는 남자
죽어도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것 같은 부끄러운 과거를 말해도 쿨하게 이해할 것 같은 남자
둘이 정말 재밌게 놀아도 내 남자 친구에게 미안하지 않은 남자.
내가 자던 내 침대에서 매일 자는 남자.
이건 약 3년 전 혹은 4년 전쯤 적어놓았던 일기의 일부이다.
저 글의 주인공이 지금의 남편이 되었는데 사연은 이렇다.
서른 초반쯤 나는 홍은동에 작은집을 구입했고 셀프로 인테리어를 했다. 전문가 도움은 거의 받지 않고 직접 했기 때문에 개성 넘치는 집이 완성되었고, 나의 손길이 덕지덕지 붙은 집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곳에서 3년 정도를 살다가 작업실을 차리게 되었고, 작업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집에 잠만 자러 한 시간씩 다녀야 하는 게 힘이 들었다. 한번 욕심껏 내 집 마련도 해봤으니 미련도 없이 작업실 근처에 작은 오피스텔을 얻었고, 홍은동 집은 전세로 내놨다.
올리자마자 계속해서 연락이 왔고 먼저 연락 온 세 사람에게만 집을 보여주기로 했다. 모두 당일에 와서 집을 봤고 셋다 계약하고 싶어 했다. 그중에 제일 먼저 집을 보고,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사람과 계약을 진행했고 그 돈으로 나도 이사 갈 곳의 잔금을 하기로 하고 이사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사 전날. 정확히 이사하기 하루 전날! 보러 왔던 사람 중에 가장 간절했던 그 계약자가 갑자기 취소 의사를 밝히며 계약금을 돌려 달라고 사정을 했다. 내일 잔금을 주지 못하면 나도 이사 할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계약금도 돌려받지 못한다. 부랴부랴 다시 집을 내놨는데 그때 가장 먼저 연락이 온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었다. 집을 계약할 때 하나의 조건이 있었는데 내가 쓰던 침대, 책장,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 시디장, 시디장에 가득한 시디들,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심지어 키우던 선인장까지 모두 그냥 두고 사용해 달라는 조건이었다. 마침 남편은 부모님 집에서 분가하는 거라 어차피 다 새로 사야 하는 건데 잘됐다며 흔쾌히 수락했고, 덕분에 나는 타고 다니던 미니 쿠퍼로 이사를 마칠 수 있었다.
우리는 계약서를 작성했고, 남편은 그때 그 계약서를 쓸 때 느낌이 이상했다며 의미부여를 했지만, 나는 멋을 잔뜩부리고 건들건들 나타난 그에게 맹세코 0.01%의 관심도 없었다.
알고 보니 우리는 동갑이었고, 둘 다 디자이너였고, 둘 다 애인이 있었다. 우리는 동갑 디자이너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고, 애인이 있다는 점에서 서로를 동성친구처럼 생각하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그때 당시 그가 도시락을 싸서 내 작업실에 놀러 온 적이 있는데 '얘가 나한테 마음 있나?'라고 생각하다가도 자기 여자 친구랑 태연히 통화하는 걸 보면서 '원래 도시락 싸기를 즐기는 애구나, 나랑 인간적으로 친해지고 싶은가 보군.' 정도로 이해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곤 두세 달씩 연락이 없어도 전혀 이상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가끔 만나면 별별 이야기를 다 하면서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는데, 그때도 여전히 친구 이상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이야기가 정말 잘 통하는 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남자 친구랑은 절대 못할 불편한 가족사, 내면의 나약함, 피해의식, 어리석음, 과거 연애사 같은 것들을 대방출하고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대화가 그저 반갑고 신선했다. 내가 내놓는 만큼 그도 똑같이 내놓아서 빚진 느낌 없이 진솔한 대화가 가능했다.
그렇게 남자 친구보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는 게 더 즐겁다고 느껴졌을 때 나는 남자 친구랑 헤어졌다. 그리고 남편한테 "그냥 우리끼리 결혼하자. 엄한 사람들 고생시키지 말고."라고 말했다.
그 후로 3개월 후에 오키나와 해변에서, 그곳이 너무 아름답다는 이유로 우발적인 결혼식을 했다. 물론 단 둘이서. 여행에서 돌아와 바로 혼인신고를 하고 같이 살집을 알아봤다. 그렇게 친구로 지낸 건 2년쯤 결혼은 3개월 만에, 결혼생활은 3년째 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 사이의 가장 좋은 점은 아직도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다는 거다. 싸우다가도 자기 잘못을 인지하면 급하게 사과도 잘하고, 서로의 아픈 곳을 건드리며 단점을 말해도 조금 분해하며 뒤끝 없이 받아들이기도 잘한다.
서로의 끼니를 걱정하고, 응가를 걱정하며, 나의 행복을 위해 상대의 평화와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고 지지한다. 나는 내 남편으로 인해 가장 자율적으로 살면서 가장 깊이 의지하고, 혼자 있어도 충만하다. 나를 충분히 나답게 해 주고, 내 모습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내 옆에서 자기 모습대로 잘 살고 있는 남편 덕분에, 앞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의 시간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좋은 결혼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첫 세입자가 될뻔했던 계약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