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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y Jan 02. 2022

새해는 부채 탕감

네가 행복하기를, 하지만 나는 해줄 것이 없어.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장판 밑에 숨겨두신 비상금을 찾아내 그 돈으로 과자를 사 먹고 거짓말을 하자, 할머니는 나를 흐물흐물 해 질 때까지 때리셨다. 7살밖에 안된 애가 밤늦게까지 놀다가 안 들어오면 문을 잠가버리시고, 옆집을 통해 베란다로 들어가면 어이없이 웃고 마시던 분이었다. 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에 혼을 내거나 찾으러 나오신 적도 한번 없었다. 할머니가 엄하게 가르치신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것,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것, 누굴 때리면 안 된다는 것 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밖에 나가서 놀다가 집에 들어오면 손을 씻어야 한다던가, 마음이 속상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건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 미리 한글을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으셨고, 다 커서도 책을 보고 있으면 눈 나빠진다고 그만 보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항상 강조하셨던 건 내가 아니라, 늘 남이었다. "남한테 잘해라." 100살이 다 되신 할머니는 지금도 안부전화를 하면 "백군한테 잘해라." "시댁에 잘해라." "수진이한테 잘해라." "이웃에 잘해라." 하신다.

그래서 내가 "그럼 나한테는 누가 잘해?"라며 투정 부리듯 말하면 "그게 다 너한테 돌아온다." 하셨다. 이렇게 말하는 할머니가 좋았다. 이런 할머니 덕분에 자유롭게 크면서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사소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겠다. 조기교육이 무서운 것이,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고, 착한 것이다.'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생각이 종종 부작용을 만들어내도, 신앙처럼 굳어진 생각은 좀처럼 유연해질 줄을 몰랐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친구가 돈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 마음이 동해 없는 돈까지 싹싹 긁어모아 빌려준다. 그러고선 혼자 뿌듯해하다가 오랫동안 돈을 갚지 않고 태평하게 카페에서 커피를 즐기는(것 같은) 친구를 보면 슬그머니 혼자 미워지게 된다. 돈 갚으라는 말을 하면 마음이 상할까 걱정되고 이 정도로 친구를 미워하고 있는 나에게도 실망하면서 마음은 점점 나빠지기만 한다. 사실 이건 착한 것도 뭣도 아니다. 나는 남을 생각하기 전에 내 마음을 먼저 알아야 했다. 친구가 내 마음처럼 내 돈을 우선해서 갚아주지 않아도 괜찮은지, 준 것을 잊어버리고 친구를 미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친구를 돕고 싶다는 마음 이전에 내 마음을 먼저 잘 봐야 했다. 

이 외에도 아주 작은 일부터 큰 일까지 내 마음을 거스르며 남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가 결국 상대가 미워지는 일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이런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면서도 나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 남을 먼저 생각한다는 그 마음엔 남에 대한 마음으로만 가득한 것이 아니었다. 습관적으로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그렇게 해서 잘 보이고 싶고 나를 더 좋아하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 또한 공존했었다. 남을 위한다는 마음이 사실 나를 위한 마음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조금씩 변할 수 있었다.   


그러다 좋아하는 분께 이런 말을 들었다. "네가 행복하기를, 하지만 나는 해줄 것이 없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해줘야 한다고 믿던 내게 이 말이 얼마나 위안이 되고, 안심이 되고, 나를 괴롭히던 많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는지 잘 공감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그랬다. 

나는 깊이 생각해 보기 전에 말이 먼저 나와버려서 입 밖으로 낸 말을 지키느라 자주 버거워해야 했었다.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두려워, 내 마음을 많이 상하게 했었다. 꼭 뭐든 해줘야 할 것 같았는데, 해줄 것이 없어도 된다니. 단지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면 된다니.

상대방은 주지도 않은 책임감과 부채감에 무거워했던 나는, 행복하길 진심으로 빌어주는 마음만으로도 괜찮다는 것을 알고 나서 꽤 홀가분해질 수 있었다. 덕분에 이제 나는 남한테 잘하라는 할머니 말씀도 지키고, 내 마음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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