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감추고 싶은 취향에 대하여
적막한 공연장에 색소폰 소리가 울려 퍼진다. 처음 듣는 편곡의 연주였지만 20년 넘게 그 노래를 들어온 사람이라면 바로 알아챌 수 있는 곡. god 오빠들의 2집 타이틀 곡,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다. 색소폰 연주자가 곡의 메인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었고, 후렴 마지막 부분이 다가올수록 연주는 더욱 구슬퍼졌다. 연주의 끝을 알리는 것 마냥 색소폰의 마지막 음이 길고 긴 호흡으로 이어졌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노래의 도입부 반주와 교차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돌아보면 너무나 아름다웠어. 내 인생에 다시 못 올 순간들이었어'
라고 말하는 첫 가사가 모든 것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게 해 줘서 엉엉 울어버렸다. 문구점에서 오빠들 사진을 사모으던 어린 시절부터, 매년 열리는 콘서트에 동창회 나가듯이 출석하고 있는 지금까지. 어떤 대상을 이토록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좋아해 온 나의 시간이 소중하고 감동스럽게 느껴져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오빠들의 공연을 보면서 울어본 경험이 전무했던 나는 '다른 팬들에 비해 감정이 메마른 사람인가?'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는데, 그날을 위해 아껴뒀던 것 같다.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는 발매됐을 때부터 수없이 들었던 노래지만, 그날 이후로는 정식 음원 버전을 들어도 그 색소폰 선율이 귓가에 자동 재생된다. 숨죽인 팬들과 같이 무대 위에서 가만히 연주를 듣고 있던 오빠들의 모습도 눈에 아른거리고 말이다. 어떤 장소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과 듣는지에 따라 같은 노래도 다르게 기억될 수 있음을 실감했다. 하도 많이 들어서 관성에 젖어있던 팬도 새삼스럽게 울려버리는 힘이 있는 노래. god 노래 중에는 이렇게 자랑하고픈 노래들이 많다.
2년 전이었던가. 한라산에 오르려고 혼자 떠났던 제주여행 첫날. 등반 전야를 장식할 마지막 일정은 혼술을 하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뮤직 바로 정했다. 음료 주문과 음악 신청을 DM으로 하는, 내향인 취향저격인 곳이었다. 계획형 인간인 나는 제주도 땅에 발이 닿기도 전에 신청곡 리스트까지 정해버렸고, 그중엔 당연히 god 노래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노래는 결국 반도 못 듣고 나와버렸지만.
처음 보는 외국 가수, 뭔가 있어 보이는 인디 밴드, 관중들이 열광하는 재즈 페스티벌 공연 실황 등등... 남들이 신청한 곡이 하나 둘 나올 때마다 기가 죽어 버려서 차마 god 노래를 신청할 수가 없었다. god의 진가는 공식 뮤직비디오보다는 공연 실황을 봐야 알 수 있는데, 그러자면 오빠들 힘내라고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리는 fangod의 응원과 떼창 소리까지 다 들리고 만다. 리클라이너 소파에 앉아 위스키나 칵테일을 홀짝이며 듣기엔 좀 안 어울리지 않나. 다른 사람들의 취향은 고급 같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쉽고 평범한 노래처럼 느껴졌다. 내가 알던 노래 중 그 공간에 가장 어울릴만한 곡을 부랴부랴 새로 찾느라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여행 첫날, 개운하지 못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대설주의보 때문에 다음날 한라산 정상 출입이 막힐까 봐 심란한 것도 있었지만 뮤직 바에서의 경험 때문인 게 더 컸다. 그냥 예약 시간에 맞춰 모인, 서로 알지도 못하고 더 볼 일도 없는 사람들인데 굳이 왜 나는 내 취향을 스스로 검열했던 걸까. 내가 신청한 노래란 걸 알아차릴 사람은 가게 주인뿐인데, 왜 그 순간 꽤 있어 보이는 노래를 듣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오빠들 노래는 누가 뭐래도 명곡인데, 내가 괜히 숨.듣.명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좀 이런 면이 있다. 스스로에게 집중하기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를 더 신경 쓰면서 나답지 못한 행동을 할 때가 있다. 내가 즐겨 들었던 팝송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댄스곡들이고, god 노래는 자다가 깨워서 시켜도 안 틀릴 자신이 있고, 지금도 최신 걸그룹 노래를 노동요로 듣는 게 나다. 어떤 나이에는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정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내 개인의 취향을 감추고 싶을 때가 있는 건지. 그렇게 해서 꾸며진 나는 내가 아닌데,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나다운 나를 지키기가 내겐 어렵다.
'이 나이에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는 게 이상한가요? 내 가수가 데뷔 27년 차에도 올림픽 체조경기장 공연 3회를 다 매진시켜 버리는 살아있는 전설인데, 응원봉 흔들고 용각산 챙겨 먹으며 떼창 하는 게 철없어 보이나요?'
이건 남들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다. 나에게 건네는 조금은 거친 응원이다.
'내가 좋으면 그만이야. 그 뮤직 바 다시 간다면 god 공연 실황 꼭 신청해라. 듣고 싶은 노래 다 신청하고 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