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훔치고 싶은 것, 하나

by 구스리

몇 년 전부터 제주도로 여행을 가면 꼭 들르는 장소가 하나 있다. 애월한담로를 따라 제주 서쪽으로 쭉 달리다 보면 나오는, 모르는 사람은 그냥 지나칠법한 허름한 외관의 그곳. 애월한담일등로또복권 판매점이다. 간판에는 '로또'가 적혀 있지만 그곳에서 로또를 사진 않는다. 내가 찾는 것은 스피또다.


동전으로 긁어 당첨 여부를 확인하는 즉석복권 스피또. 스피또는 홈페이지에 당첨 현황과 출고율이 공지된다. 나는 그걸 꼭 확인한 뒤에 스피또를 사는데, 출고율은 높지만 아직 1등 당첨 복권이 남아 있을 경우만이 복권에 투자할만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출고율이 높을수록 시장에 풀린, 이미 긁힌 복권이 많다는 뜻이고, 남아있는 것 중에 1등이 있다는 사실이고, 그것이 내 손에 들어올 확률도 높아졌다는 사실이니까.


애월한담로의 복권집은 어쩌다 우연히 그런 높은 확률을 만난 곳이다. 1등 기회가 아직 남아 있는데 출고율도 아주 높은 회차였다. 그때쯤이면 물량이 부족해 집이나 회사 근처 복권방에는 벌써 다음 회차 스피또가 입고된다. 소액 당첨된 복권을 들고 당첨금을 복권으로 바꾸러 갈 때마다 다른 회차 스피또만 남아있을 땐 왠지 아쉬운 느낌이 든다. 그렇게 애타게 찾았던 대상이 제주도 복권방엔 아주 넉넉히 남아있었다. 관광지에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은가 보다. 갖고 있던 현금을 털어 스피또를 잔뜩 사서 긁었고, 지금은 다 어딘가로 증발해 버렸지만 역대 최고 액수의 당첨금이 나와 기분 좋게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가장 훔치고 싶은 것은 돈이다. 행운처럼 쥐어지는 공돈. 20억짜리 스피또 1등 복권 한 묶음, 좀 더 욕심부리면 두 묶음까지.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 중엔 갑자기 들이닥친 행운에 어찌할 줄을 모르다 불행해졌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 다년간 긁지 않은 복권을 가슴에 품고 써내려 온 위시리스트가 있으니 누구보다 계획적으로 소비할 수 있다. 투자 계획도 있다. 복권에 당첨된다면 나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진짜 훔치고 싶은 것은 돈보다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팔아서 돈을 버는 내게 하루는 너무 빠듯하다. 24시간을 모두 팔아 일에 매진해도 부자가 되긴 힘든데, 퇴근하면 남는 시간을 쪼개 잠도 자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강아지 산책도 시켜야 하니까.


책도 읽고 싶고, 낮잠을 거하게 자고 싶고, 계절마다 산에도 오르고 싶은데. 하고 싶은 일은 돈이 되는 일, 생활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에 별 수 없이 자리를 내준다. 돈을 버는 생활 기계가 된 느낌이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 정했다! 우선은 1등 스피또를 훔치자. 그 돈으로 재테크를 해서 마르지 않는 샘을 만들자. 더 이상 내 시간을 팔지 않아도 돈이 모이게 하자. 그러면 하루 24시간은 온전히 나의 것이겠지. 집에 가는 길에 밤늦게까지 문을 열어두는 복권집에 들러 스피또를 사야겠다. 훔치기 전까지는 그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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