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날
"한 집안에서 주권이라고는
전혀 없는 아이 때에는
부모님이 출타하셨을 때가
그중 자유의 날이다."
기회는 이 때다 하고 덤비지만, 실제로는 뭐부터 해야 하는지, 뭘 하며 지내야 하는지를 궁리만 하다가 그냥 세월만 보내는 수가 많다.
그날은 집안 어르신 댁에 회갑잔치가 있다고 해서, 다니러 가신 부모님은 내일에나 오실 거라서, 거의 이틀의 말미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끼리만 놀면 마당 한쪽 구석에서 바닥에 그림도 그려 보고, 닭을 몰아 보기도 하고 그러는 게 다였겠지만, 큰오빠가 집에 있는 날이어서 다른 날보다는 확실히 특별해졌다.
감자밭에는 보랏빛 꽃이 한창이던 때였으니까, 고랑 고랑이 다 자란 감자를 담고 있어서 갈라진 곳도 있고, 부서진 흙더미에는 개미 알인지 뭔지가 여기저기 흔적을 내고 그러는 초여름의 살기 좋은 때였다. 감자를 다 캐진 않고 아직 때를 기다리고 있어서 한쪽 끝에서 일부만 조금씩 캐 먹던 터라 큰오빠가 계획해낸 것은 감자를 캐다가 요리를 하는 것이었다. 아니다. 그건 아닌 것 같다. 캐는 과정은 없었다. 엄마가 이미 캐다 놓은 감자가 함지박에 가득 담겨 있었던 것 같다.
처마 끝으로 흐르는 빗물로 토방 아래는 작은 물웅덩이도 생기고 우리가 나가 놀기는 영판 글러 버린 날이어서 결국 어른들 생각으로는 말 짓에 속하는 일에 돌입하고야 말았다.
" 말 짓의 제목은 감자 샐러드!"
함지박에 있는 감자를 물에 대충 씻어서 안방으로 다 들고 갔다. 그리고 식구 숫자대로 놋 숟가락도, 감자를 긁은 껍질을 모아 놓을 바가지도 물론 챙겨서다. 다들 모여 앉아 감자를 숟가락으로 벗기기 시작했다. 오빠 셋 그리고 나 하면 사람이 넷이나 된다. 머리를 박고 벗기기 시작했는데 이렇게나 많은 감자를 언제 다 깔까 싶어 지레 겁도 났다. 그래도 감자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까졌다. 물 묻은 햇감자는 숟가락으로 한번 쓱 당겨 긁으면 금방 민둥민둥한 속살을 드러내며 껍질이 수월하게 벗겨졌다.
" 손톱으로 잡아서 쭉 들면 그저 힘없이 잘만 벗겨졌다."
동글동글한 감자를 까면서 우리는 수다쟁이 둘째 오빠의 만담을 듣느라 깔깔대기도 하고 무슨 얘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배꼽을 쥐고 방바닥을 돌기까지 했다. 하다 보니 한나절이 후딱 지나갔다. 오빠들이 샘가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떠 붓고 씻고를 한참 하더니 부엌으로 들고 갔다. 국 끓이는 양은솥에 대접 하나를 뒤집어 깔고는 감자도 넣고 물도 넣고 그 위에 소금도 좀 뿌리더니 불을 지폈다. 비 오는 날의 땔감은 불을 붙이기가 영 사나웠지만, 축축한 나무를 어쨌든 요령껏 때서 감자를 쪘다. 감자는 생각보다 빨리 익지를 않았다. 점심때는 지나가는데 솥에서는 김만 났다. 큰오빠가 젓가락으로 찔러보면서 아직이라고 자꾸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뚜껑을 자주 열어 보니까 더 잘 안 익었나 본데 그때는 그 이유를 잘 몰랐다.
" 출출할 만큼 출출해진 동생들에게 큰오빠는 특별요리를 해 주겠다고 다듬이질할 때 쓰는 기다란 방망이에 손을 댔다."
그것으로 평소 엄마가 밀가루 반죽을 밀고 그랬으니까 우리가 써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다 익은 감자를 꺼내니 김이 솔솔 났다. 드디어 감자를 방망이로 찧기 시작했다. 오빠들하고 나도 서로 돌아가며 찧는데 파근파근한 감자가 깨질 때마다 맛있는 냄새가 나서 우리를 가만 두지를 않았다.
하는 대장 오빠의 만류는 들은척도 않고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하나가 둘되고 둘이 셋 되다 보니, 정작 감자 샐러드가 아니 감자 범벅이 되었을 때는, 모두 뒤로 나가떨어져 더는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큰오빠의 계획은 감자 찐 것은 자주 먹을 수 있지만, 감자 샐러드는 나름 특별요리라 생각하고 꾸민 일인데 우리의 허기진 배와 감자에서 솔솔 나는 맛난 냄새 때문에 결국은 원하던 재미를 못 보고 끝이 났다. 그릇 주변으로만 남아서 붙은 감자 범벅은 하얀 눈을 쓸어서 마당 담벼락에 방치한 모양새를 하고는 안방 모퉁이에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홀로 남았다.
"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아랫목은 뜨끈하고,
감자로 채워진 배는
남산 만해져서는
우리는 함지박을
뒤로한 채
모두 퍼 잤다."
"
"
"
낙숫물 소리는 그치고, 저녁이 다 되어 돼지도 꿀꿀거리고, 소도 음머~~~하며 밥 달라고 점잖게 신호를 보낼 쯤에야 하나씩 부스스 잠에서 깨었다.
" 비 그친 담벼락엔
저녁 호박꽃만
조금 남은 햇살에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감자와 꽃 사진 출처 http://nat-cal.net/bbs/view.php?id=day2&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it&desc=asc&no=315&PHPSESSID=9f31acdffa0ebc48b8fe76d29751d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