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 운동. 인정. 빵
한동안 주춤했던 나의 꼰대 기질이 잘라낸 자리에 원치 않아도 밉상스럽게 올라오는 사마귀처럼 어제 오후부터 자꾸만 도지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머릿속에는 지난 일이 골똘하게 떠오르고 오늘 만날 사람과의 약속 변경이 번거롭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미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서 정해진 약속 장소와 시간을 한순간에 바꿔 버리는 한 친구가 미워지고 건방지다는 생각도 들고 참 기분이 좋지가 않은 아침이었다.
아침 밥상을 차리면서 가족들에게 말했다. " 나 지금 기분이 아주 나쁜데 왜 그러는 걸까." 그랬더니 누군가가 왜 그러냐고 묻는다. " 응. 웃기잖아. 실컷 약속 잡아 놓았더니 맘대로 바꾸자고 하고 나 속상해. 머릿속이 찜찜하고 왜 그러지?" 하고 또 한 번 물으니 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다 해놓은 약속을 번복하는 것은 안 좋은 매너야. 사람 힘들게 왜들 그러는지 몰라." 하며 내 편을 들어주었다.
" 그렇지? 내가 기분 나쁜 건 당연하지? 근데 있잖아. 나 그것 말고 더 먼저 속상한 일이 또 있었어. "
"그래? 그건 또 뭔데?"
" 응. 나 문화센터에서 배우는 거 있잖아. 거기서 이번에 내가 반을 바꾸게 되었는데 그 반에 가 보니 같이 배우던 친구들이 조금밖에 안 온 거야. 생각지도 않았는데 깜짝 놀랐어. 왕따 된 기분이야. 이건 뭐 그런 게 있는지 머릿속이 복잡하고 자꾸 나쁜 생각만 나. 왜 그러지?"
난 수십 번 왜 그러지 왜 그러지를 반복했다. 가족들에게 " 아무래도 나 꼰대 기질 있나 봐. 그거 도지는 것 같아. 혹시 나 생리기간인가?" ㅎ ㅎ 남편은 날짜를 확인해 보더니 이번에는 길어지는 것 같다고 그런다.
어쨌든 가족들의 역성을 듣기도 하고 딸이 도서관에 가는데 차려입은 게 예뻐서 현관에서 사진도 찍어주고, 운동복 중에서 좀 나은 걸로 차려입고 운동을 마친 다음 그대로 아침에 변경된 약속 장소에 나갔다.
아침 내내 미워하고 곱씹었던 친구는 생각 외로 나에게 편하게 대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른 친구에게 오늘 기분이 좀 언짢은 날이라고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고만 말했다. 그랬더니 자기도 아침 일찍 인턴으로 출근하는 아들 때문에 밥하느라 부지런을 떨었더니 한 시간이 무서운지 엄청 피곤하다며 만나자마자 떠들어댄다. 그러면서 영화표를 끊는데 자기 할인카드로 내 것도 해 주니까 거기서 일단 기분이 한번 나아지기 시작했다.
맛있는 쟁반 메밀도 먹고 튀김도 유부초밥도 골고루 나눠 먹다 보니 또 한 번 좋았다. 자리를 옮겨 김혜수가 나오는 영화를 봤는데 멋지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래서 한바탕 울고 났더니 다시 내 기분이 달라졌다. 점심을 거하게 먹었는데도 고명으로 길게 채 썬 오이를 돌돌 감아올리고 빨간 새우를 신선하게 올린 얇은 피자를 사 가지고, 이 삼복더위에 백화점과 대형 건물이 즐비한 광장 벤치에서 나누어 먹기 시작했다. 다들 여름 피자로 맛이 상큼한 게 참 좋다면서 맛있게 먹으며 나의 선택을 칭찬해 주었다. 쓰레기를 정리하느라 커피를 거의 다 마신 종이컵을 들고 있다가 벤치에 잠깐 놓아두었는데 휙 바람이 불어오더니 내 흰 바지에 와락 쏟아부었다. 그리고는 종이컵이 광장으로 광장으로 굴러만 갔다. 사람들은 그냥 놔두라고 했지만 평소 정의로운 나로서 그걸 그냥 둘 수 없어 종종걸음으로 쫓아가다가 결국에는 탁 주워 가지고 와 피자를 먹고 난 상자에 넣어 단속을 했다. 나머지 뒷마무리는 다른 친구가 말없이 조용히 남몰래 처리하는 것을 나는 봤다.
더운 광장이 싫다며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 둘러보다 보니 예쁜 모자들이 많이 나와 있다. 아침에 밉상이라고 말했던 친구에게 어울릴 것 같아 권했더니 본인도 맘에 든다며 여러 번 써보더니 이내 샀다. 그러면서 이 모자 집은 쇼핑백도 이쁘다며 좋아라 한다. 그래서 나는 또 한 번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는 그러고도 이 더운 날씨에 팥빙수를 먹지 않으면 빙수님이 서운해한다면서 카페로 갔다. 우리가 간 카페는 시원하기가 그만이고 고급진 그릇에 담긴 전통 빙수는 그날따라 맛이 최상이었다. 찰떡도 사이좋게 나눠먹고 다음 달에는 깨끗한 시내 어느 장소를 물색해서 하룻밤 내내 수다도 떨고 맛난 것도 먹고 그러자면서 새로운 계획을 짜느라 몰두했다.
놀다 보니 저녁시간이 다 되었다. 모자를 산 친구가 맛있다고 말해서 연잎을 싸서 찐 오리고기를 두 개나 사가지고 집으로 향했다. 오다가 머위대도 한 단 사가지고 들어왔는데 아들이 자고 있다. 머위대를 삶아서 껍질을 벗기고 있자니 덥길래 냉장고에서 노각을 꺼내 필러로 깎은 다음 세로로 길게 잘라서 반은 아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내가 먹었다. 속이 금방 시원해졌다.
머위대를 벗기면서 아들에게 오리고기를 사 왔는데 뭘 해 먹으면 좋을까 하고 물었더니 슬금슬금 주방에 와서 양파도 까도 토마토도 썰더니 한번 맛보고 맛이 있다고 내 입에도 넣어준다. 나는 머위대 볶음을 만들고 아들은 오리볶음을 하고 있을 때 내가 그랬다. " 엄마가 아침에 기분이 꿀꿀하다고 했잖아."
" 응. 지금은?"" 응. 나 지금은 정말 좋아. 운동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그랬더니 지금은 다 풀린 것 같아." 그랬다.
"잘했네. 역시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해. "
그런다.
나의 꼰대 기질은 하루 만에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것은
첫째, 가족들의 응원
둘째, 운동
셋째, 친구들의 인정 덕분이리라.
참 헤어질 때 한 친구가 나에게 괜스레 빵을 사 주었다. 왠지 감동이 되었다. 그 친구는 내 풀풀한 기분을 자기에게 털어놓은걸 보고 나름으로 위로를 해준 것일까. 하여간 그 빵 때문에 또 한 번 좋았다.
그럼 넷째, 친구의 빵
좋은 하루였다. 그리하여 나의 꼰대 기질은 멀리멀리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