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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또르쟈니 May 25. 2023

집에서 쫓겨나 보았다.

발길은 서촌으로


 반팔을 입을 정도의  봄이면 이미 여기저기 나다녀서 몸이 고단할 대로 고단한 상태이다. 며칠 전부터 딸이 일요일 오후에 친구들을 초대해도 되냐고 해서 별생각 없이 대답은 해놨다. 이차저차 노느라 집을 돌볼 여유가 생기질 않아 새벽에야 일어나 밀린 주방을 정리하고 싱크대도 좀 닦고  찬장 안에  뚜껑 열린 채 넣어둔 그릇을 가지런히 놓았다. 음식쓰레기도 제대로 넣고, 분리수거도 하고,  수경재배 중인 화초를 담고 있는 유리컵들도 투명해져야 청량감이 생겨 화초 꽂은 보람이 있겠다 싶어 정갈하게 닦고, 그것을 멋지게 꾸며도 보았다. 우리 가족끼리 살 때와는 다르게 더 깔끔해야 하므로 이것저것 손 볼 곳이 수두룩하다. 말린 빨래도 부리나케 접어서 제 둘 곳에 두었다. 마지막으로 수건을 만져보니까 아직 덜 말랐다. 빨랫대채 둘째 딸 방에 넣고, 커피물까지 끓여 놓았더니 그때야 나 씻을 시간이 되었다. 평소엔 안방에서 씻지만 오늘처럼 손님이 오는 날에는 씻으면서 욕실 청소도 겸해야 해서 애들이 사용하는 욕실을 사용했다.  나도 씻고, 욕실도 씻고, 그리고 오는 사람 기분 좋으라고 유리도 선반도 세면대도 변기커버도 수건으로 뽀독뽀독 닦고, 욕실화가 젖으면 손님이 밟았을 때 발이 젖을까 봐 특별히 관리했다. 화장실 문턱까지 닦고 나니  그제야 나의 외출준비가 가능해졌다.


 둘째도 같이 쫓겨나는 입장이라 함께 역으로 나가려니 그 애는 목적이 분명하거늘 난 과연 이렇듯 혼자만의 시간에  어디를 갈지 나 스스로도 궁금했는데  글쎄 나의 머릿속은 경찰청 건너편의 내자땅콩을 생각하고 있지 뭔가. 내자땅콩의 옛날 과자는 남편이 좋아하는 것이다. 친구들이랑  지방 가고 없는 남편 과자나 사러 가고 별 수 없는 주부인 게 분명하다.  


 버스를 타고 한강을 넘어서  연대 근처의 철길엔 분홍색 덩굴장미가 길게 늘어서 있다.  사직터널을 지나 마을 언덕을 보자니 붉은 장미가 지금은 오월입니다라고 내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려 양산을 펼치면서 내자땅콩 가게를 찾아봤다. 상호는 보였지만 굳게 닫힌 셔터는  휴일임을 멀리서도 알아낼 수 있게 했다.  

일단 실망!

그래도 자주 다니던 길이니  지나다가 서리태 메밀 콩국수를 시켰다. 맛은  기가 막힌데 몇 젓가락 먹고 나니 허전하다. 다른 사람도 겸해서 먹는 김밥을 주문하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 했다. 김밥도 집에서 싼 것 이상으로 손맛이 좋다. 든든하고 맘에 드는 혼자만의 식사. 밥값은 13,000원 요즘 밥값이 이렇타카드라. 시간도 5시까지 인지라  여유롭기도 하고, 먹은 만큼 움직이기도 해야 해서 효자동으로 숭인동으로 돌아다녔다.  첫 골목에  사람이 의자에 열댓 명이 앉아 있어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까 거기는 상호가 "잘 빠진 메밀"이라고 씌어 있었다. 주변에 "효자동 국수"가 있어 그것을 메모했다가 아니다 싶어 아예 "잘빠진 메일"을 찾아보니까  메뉴도 나오고 뭐 그래서 나의 채팅방에 저장해 두었다.

혼자 시내를 배회한 적은 없어서 주변을 살짝 훔쳐봤더니 다들 해를 쬐러 나왔는지 아니면 선크림을 50 정도는 발랐는지 나처럼 양산을 쓴 사람은 100에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주일이라

교회에서 막 나온 사람들로 거리는 분주했다.


담쟁이와 장미


 터벅터벅  향기가 좋길래 따라갔더니 담장에 핑크빛 장미가 손바닥만 하게 큰 얼굴로 웃고 있다. 떨어진 꽃잎이 몇 장 있길래 주워서 향기를 맡아보다가 그 길을 따라가 보았다. 어린이도서관이 인적 드문 자리에 새로 지어져 있었고 그 바로 앞에 오래된 스쿠터와 쓰레기 봉지가 나름 정돈되어 있는 담장 위에는 아직 익지 않은 오디가 다닥다닥 달려있다, 호기심에 그 집을 두어 번 둘러봤더니 거긴 폐가인듯하다. 모든 문은 닫혀있고 그 안에서 십 년이고 몇 년이고를 생각 안 하고 자라난 몇 그루의 뽕나무는 이 근처가 예전에 잠업이 성한 곳은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을 하게 했다.  이런 집 고쳐서 살면 어떨까도 싶었는데 나름의 안목이라고 그 집은 사도 낀 집, 한마디로 큰길에서 좀 떨어진 집이라

별로다 하며  여우가 신포도를 보는 듯 지나쳤다.

햇살은 좋으므로 겁도 없이 인왕산 근처의 을을 이리저리 보고 다녔다. 다니다 보니까 한 번도 알지도 못하고, 다녀보지 않은 길에서 맹아학교와 농학교를 만나게 되었다.  맹아학교 정문에는 피튜니아가 화사하게 길게 늘어서 있었고,

농학교 담장에는 타일에 새겨진 점자들에 담긴 메시지들이 한 장 한 장 시처럼 또는 격언처럼 또 아니면 일반인보다 더 심오한 뜻을 지닌 것을 보고

새로운 오늘을 사는 느낌이 컸다.

세월을 견뎌낸 인동초
집앞에서 보는이를 기쁘게하는  화초


 내 맘이 불편함으로 까지 차오르거나, 아니면 나의 존재감이 별볼이 없고, 하찮게 여겨지는 날, 이곳을 혼자  한 번 걸어본다면 새로운  나를 알아내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촌 중에서도 인왕산과 더 근접한 곳들은 아직 그리 개발되지 않아  높아진 빌딩숲에서와는 또 다른 그 어떤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그곳도 우리네 고단한 영혼을 식히기에는  괜찮은 장소라고 여겨지는 시간이었다, 담쟁이가 오래된 돌담을 뒤덮고 그 속에서  견디고 견뎌 피어난 인동초와 집은 낡았지만, 대문 앞에 꽃을 달아 심어 그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나 오가는 사람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하는  손길, 그것이 나의 지금의 옷매무새와, 마음 안의 정갈함을, 한 번쯤은 곧추세우게 한다는 게 반갑고, 고마운 일 같다. 인왕산 바위 근처까지 이탈리안 음식점이 들어서 길가에서 올리브유 향이  나는 건 제대로인 건지.

그나마 통인시장의 꽈배기가. 절편이. 반대떡이. 인절미가.  우리네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그래도 아직은 집 밖에 화초 몇 개 정도는 내어 심고,  대문 열면 이웃집이 그리 멀지많은 서울장안의 옛 동네에서 조용한 시간을 즐겨보는 것도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해봄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통인시장의  쉬는 날


 내자땅콩 아저씨가 밀가루 반죽과 땅콩이 섞인 것을 화덕에 부으면서,  불 앞에서 김 나간 과자를 봉지에 담는 모습이 선하다. 어느 한 날  꼭 그것을 사 오고야 말리라 각오한다. 그게 다시 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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