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추리꽃
아무런 할 일도 없는 날이면 마을 어귀를 배회하다가 오솔길을 따라 내내 걸을 때가 있다. 길가에 내던져진 막대기라도 하나 있으면 그것을 주워 들고 땅에 대고 직~~ 긋기도 하고 여기저기 풀숲을 뒤져 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길 양옆에는 산딸기도 가끔 보이고 뒷볼에 밀가루를 발라 놓기라도 한 것처럼 솔바람에 쓸리는 쑥은 어느덧 한창 자랐다. 내가 아는 수풀이래야 보라색 꽃을 피운 자운영. 질경이. 제비꽃 그런 정도인데 여기저기 제 나름의 꽃을 피우느라 다들 분주한 것 같다.
수풀들의 잔치를 보다가 근처의 야산에 발을 한걸음만 디뎌 봐도 거기 또한 별천지다. 몇 해 되지 않은 소나무들이 군데군데서 별 세력 없이 자라고 그 아래에는 노란 원추리 꽃이 비밀스럽게 햇살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노랗게 빛난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어서 나무숲 저 끝까지 정원을 이루고 있는데 선명한 노란 꽃은 햇빛과 꼭 맞게 어울린다. 초란의 노른자를 풀어놓으면 서로 구분이 어려울 만큼 그런 예쁜 정원이 그 산속에 숨어 있음을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놀라운 정경이다. 빳빳한 고개를 한 원추리 꽃은 어쩌다 이런 산에서 자랄까. 무릎을 낮추어 향기는 있나, 어디가 더 예쁜가를 보면서 가까이 다가서면 가끔씩 취나물이나 고사리가 쭈뼛거리며 자라고 있다. 아무런 도구도 없이 몇 개비 산나물을 뜯어 손에 쥐고는 그냥 말려 버리기 일쑤다. 손이 뜨거워 나물이 삶아지려거든 홱하고 아무 데나 던져 버린다.
늦은 봄이기도 하고 초여름이기도 한 것 같은 그런 날에는 몸이 느른하다. 느리게 느리게 세상 구경을 하다 보면 까맣게 익은 오디를 보고 따먹기도 하고, 모를 심고 난 논에 가득 채운 물 위로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청개구리를 바라보기도 한다. 말간 등을 보이며 제 나름의 재간을 부리던 청개구리도 어느 순간 홀딱 뒤집어져 하얀 배를 드러내며 헬렐레할 때도 있다.
느립느립 여름으로 가고 있는 들판에는 뭔지 모를 움직임이 있다. 세상 것들은 모두 다 꽃을 피우고, 무럭무럭 자라고, 산속에서는 뻐꾸기가 뻐꾹뻐꾹 하품하는 소리를 낸다.
나른한 오후의 산책을 하노라면, 동네 한 바퀴를 다 돌아온 적도 많다.
괜히 심심하면 들고 있던 막대기로 땅을 후벼보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개미집이라도 건드리면 뭔가 들썩들썩하던 들녘에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하얀 싸라기를 머리에 인 개미들의 행렬에 두어 발 뒤로 물러서서 식은땀 나는 목덜미를 훔쳐야 한다. 논 옆으로 조그맣게 딸린 밭에는 보라색 꽃을 피운 감자가 한껏 자라고 있기도 하고 마늘밭의 마늘종이 곱사등처럼 고부린 채 하늘 볼 날을 기다리는 것을 알아낼 수가 있다. 허물어질 듯한 언덕에는 마디를 지닌 잔디 뿌리가 쏙 빠져나와서는 편안하지 못한 살림살이를 사는 태를 낸다. 제비꽃은 서로 모여서 피는데 아무도 크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땅바닥에 딱 붙어서 사는데 그래도 갓 시집온 새댁들처럼 화기가 도는 것이 귀엽고 예쁘다.
길은 나름으로 2차선이다. 달구지가 지나다녀서인지 양쪽엔 대머리처럼 자리가 나 있고 가운데에는 뻐쩡한 이름을 모르는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저희들끼리 차선을 나누는데 한몫을 한다. 지나가자면 모내기한 땅에 물을 빼앗긴 시냇가에는 돌미나리가 해를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내며 제 키를 키우고 있다. 발이 젖을까 봐 들어가지는 못하고 가지고 다니던 나뭇가지로 미나리를 헤집어보면 줄기는 연록이요, 밑동은 검은 보랏빛인 돌미나리가 딱 캐도 좋을 법하게 잘 자라고 있다. 흐르는 물가에는 이런저런 풀들도 많다. 싱아도 있고, 꽃을 피운 냉이. 씀바귀는 노랑꽃을 피워서 바람에 실렁실렁 춤을 추기도 한다. 삘기는 어느덧 긴 솜사탕 모양으로 바래 져서 훅 불면 날아갈 듯 늙어져 있다.
소소한 나의 휴일에는 이처럼 나만의 장소로 유유자적 다니면서 시간을 보낸 적도 많다.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나를 유인한 노란 원추리 꽃이 블랙홀처럼 빨아들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를 늦은 봄에서 초여름까지의 나의 여정이다. 지금도 환하게 나를 부르던 원추리 꽃들의 노란 부름은 내 속에 환희의 샘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마음이 쓸쓸하거나, 하릴없거나, 혹여 내 속에 분노나 미움이 있다 싶을 때 집 밖으로 나가 보라. 세상은 말하지 않지만, 제 나름의 빛깔로 열성으로 꽃 피우고 열매 맺으려 남 눈치 채지 않게 부지런을 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자연의 것들은 나에게 소리 없이 대화를 청할지도 모르고, 나의 이야기를 내가 조근조근 말하면 다 들어줄지도 모른다.
다들 표정도 달라서 걸으면서 바라보는 여럿 풍경들은 한 번쯤은 내게 깨달음을 준다. 자연의 것들이 이토록 제각각인 것을 인간의 살아가는 모양새 또한 모두 같지 않을 것임을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내 맘과 똑같기를 바라고 나처럼만 살아주기를 요구하거나 바랐다면 그것은 욕심이고 쓸데없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미나리는 미나리대로 제비꽃은 제비꽃대로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내가 땅콩처럼 작은 들 얼굴이 호박만 한들 그게 다 무슨 문제란 말인가. 조금 부족해 보여도 내 마음은 원추리 꽃처럼 환하고 곱지 않은가.
제각기 다른 색깔로 그렇지만 자연의 조화로움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적당히만 리드미컬한 사람으로 살면 예쁘고 곱다는 생각이다. 저만 잘났고 저만 튀기를 바란다면 그 관계는 아마도 오래가기 힘들어질 것이다.
한가하거나 하릴없거나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날 때. 그때가 바로 당신이 들로 산으로 나갈 때임을 눈치 채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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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진 5,6 촬영 니또르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