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간
사람들은 “어릴 때 난 그랬어.” 라면서 자신의 특별한 체험담을 말하곤 한다.
어릴 때라는 말속에는 나의 어린 나이 때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데 그 기준은 말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가 있다.
나의 경우는 열 살 즈음으로 떠오르는데, 웬일인지 유독 밥만 먹고 나면 예외도 없이 뒷간에 가 가고 싶어 졌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 것일까. 하여간 밥만 먹고 나면 아랫배가 틀고 뭔지 부엌에 계속 있기가 불편한 상태가 되는 일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지금 반성의 의미로 그때를 풀이해보면, 아마도 그것은 설거지에 대한 부담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 판단이 된다.
몸과 마음은 따로국밥이 아니어서 나의 생각과 몸은 동업자 관계였을 것이다. 마음이 기쁘면 몸도 신나 하고, 또한 몸이 고달프면 마음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과연 나만 그러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누구나 몸과 마음은 친구일 게 틀림없을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밥만 먹고 나면, 곧바로 뒷간 생각이 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침때든 저녁때든 남자들은 부엌에 상을 물려주는 데까지는 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무조건 여자들 일이 되었다. 언니는 상에 있는 빈 그릇을 정리해서 가져 오라며, 물비누질도 하고 부지런히 설거지를 했다. 그렇지만 나는 달랐다. 설거지하는 일이 버거워서였는지, 다른 사람들보다 몸과 마음이 특별히 일심동체여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설거지 도중에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몸에서 신호가 왔다. “ 언니~~~ 나 화장실!” 하면서 쏜살같이 뒷간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내 마음에 잔꾀가 생기니까, 충성스러운 내 몸은 이렇듯 매번 잘도 반응을 해주었다.
휴식처이고 피난처인 그곳에서 볼일을 다 보고 나와 보면 언니의 설거지는 얼추 다 끝나 있었다. 언니는 행주 하나를 짜 주면서 부뚜막이랑 솥 주변을 닦으라고 했다. 내 주먹의 세 배는 되는 엑스란 내복을 찢어서 만든 빨간 행주를 들고 가마솥을 닦자면, 내 키가 모자라서 신발을 벗고 올라가서 솥 둘레를 빙빙 돌면서 용을 써야 했다.
맨 왼쪽에 걸려 있는 솥은 제일로 큰 것으로 거기에는 식구들 씻을 물이나 짐승들 줄 물을 끓였는데, 그때까지도 아침부터 지핀 군불이 남아 있어서 솥뚜껑 아래로 조금씩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힘닿는 데까지 닦아보지만, 아직도 뜨끈뜨끈해서 대충 닦는 시늉만 했다. 부뚜막 가운데에는 밥을 하는 가마솥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 솥 중에서는 그중 맵시가 있고 반질반질했다. 언니가 누룽지까지 다 닦아냈는데도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고, 크기도 넘치지는 않아서 기쁜 마음으로 행주질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 보면, 마지막으로 오른편에 있는 국 끓이는 양은솥만 닦으면 되는데 국솥에는 김치 국이나 시래기 국이 남아 있을 때는 따뜻해서 그래도 괜찮았다. 그렇지만 음식을 다 먹어서 빈 솥일 때는 냉기가 올라와 내 여린 손은 썰렁하고 기분이 나빠졌다.
언니는 설거지를 전적으로 도맡아 하는데 거성 바른 나는 부뚜막 정도나 닦고, 어영부영했는데도 나는 이토록 할 얘기가 많다. ‘이것은 뜨거워서 저것은 차가워서’ 하면서 내 속으로 하기 싫은 이유를 찾아내는 데는 명수였다.
반면 나로 인해 벌어지는 우리 집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경우를 얼마 후 이웃집에 놀러 가서 알게 된 일이 있었다. 우리 집 담 너머에 사는 딸이 넷이나 되고 아들이 둘인 집인데, 큰 언니가 시집을 간다고 해서 이웃사람들을 다 불렀을 때의 일이다. 설탕물에 사과를 껍질째 얇게 잘라서 띄워 놓기도 하고, 수정과에 곶감을 담가 놓기도 한 잔치 집에서는 여기저기서 좋은 냄새가 났다. 맛있는 것도 먹고 모두들 흥에 겨워 있는 그 집에서 뭘 하려고 갔는지 부엌엘 들어가게 되었다.
평소 목소리가 옥구슬 굴러가듯 하는 언니들은 또 목소리와 몸이 일심동체였다. 고운 목소리만큼이나 그 언니들은 하는 짓도 천사 같았다. 과방은 어른들이 맡아서 하기 때문에 부엌 설거지는 언니들 차지였는데 그 많은 손님을 치르면서도 진행이 일사천리로 착착 이었다. 그런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 언니. 그건 내가 할 게. 조금만 쉬었다가 해. 내가 할 게. 아니야. 난 괜찮아. 너나 좀 아랫목에서 몸 좀 녹이고 나와.”
곱상한 목소리에 몸조차 늘씬한 언니들은 자매끼리 서로 친절하고 삭삭 해서 잔치 집 부엌은 농땡이의 대가가 살고 있는 우리 집과는 영판 다른 분위기였다. `세상은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키 작은 소녀가 바라보던 그 순간은 참으로 생경하였다. 천국과 지옥을 구분한다면 답은 너무도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옥구슬 목소리의 처녀들이 사는 그 집에는 봄이 오면 꽃상추를 심었다. 뒤란에 쭉 하니 많이도 심었는데 가지런하게 잘도 자랐다. 논밭도 많지가 않아서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아서인지 푸성귀를 열성으로 키웠다. 우리 집 적상추가 덜 자라거나 부족하다 싶으면 아주머니가 꽃상추 겉잎을 요령껏 따서 한 바구니씩 담 너머로 넘겨주시곤 했다. 그 안에는 쑥갓이나 아욱도 덤으로 같이 있을 때가 더 많았다.
나는 적상추보다 꽃상추가 더 맛있게 느껴졌다. 그것은 꽃상추가 예뻐서인지 언니네 부엌의 정경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깔끔하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살아서인지 그 집 아주머니는 우리 아버지보다 연세가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오셔서 성가도 부르고 기도도 해 주셨다. 아주머니의 마음 안에 따뜻함과 정결함과 정돈된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아버지의 장례식 때 난 몰래 훔쳐볼 수 있었다.
밥을 먹고 나면, 지금도 설거지가 관건이다.
설거지가 뭐 그리 재미있는 일인가.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설거지는 새로운 삶에 대한 준비과정이라고 보면 어떨까. 먹고 난 뒤처리라기보다는 사랑스러운 나 자신과 내 남편과 자식들의 다음 끼를 위한 숭고한 준비과정!
이러저러한 최면을 걸어도 나의 설거지에 대한 습관은 오래도 갔다.
그렇긴 했지만, 어쩌다가 기분이 나서 깨끗이 그릇들을 씻고, 싱크대도 닦고, 벽타일에 소다와 주방세제를 섞어 발라 두었다가 물행주로 썩썩 문질러대면, 처음처럼 반짝이는 하얀 타일의 투명함에 기분이 싹 좋아질 때가 있다. 행주도 뽀얗게 삶아서 창가에 널어 두면, 바람과 햇볕에 고슬고슬 말라 뽀송해진다. 그 빳빳한 감촉이란, 살림을 살아내는 주부의 신바람 나는 자존심 살리기와 딱 맞는 현상이랄 수 있다.
요즘 건강도 좋아지고
마음도 평온하다 보니
점점 주방이 깨끗해지고 있다.
이웃 언니들의 목소리가
달그락달그락
설거지를 할 때마다,
어디선가 상냥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