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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또르쟈니 Sep 17. 2017

산행 회군

노신사

 물 한 병, 초코바 한 개, 지갑, 전화기------

가방에 든 것은 그것뿐이었다.



 팔을  다친 지 한 달반이 되었다. 뼈가 붙어야 해서 했던 깁스는 풀고 이제부터는 재활훈련을  해야 한다. 그것만  풀면  살 것 같더니 약해지고 굳어버린 팔을  원래대로 회복시켜야 해서 한 달여 동안 보조대를  차고 다녀야  한단다. 몸은  이런데 하늘에 구름이 좋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 집안에 있기가 뭐했다. 지루함을 견디기도 그렇고 멋진 가을을 즐길  자격이 내게도 있는듯해 집을  나섰다.



 중간중간에 안부를 묻던 가족들이 내가 산에 가고 있다고 하니 노발대발이다. 이유인즉슨 어렵게 어렵게 치료 중인데 또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것 같다. 나무늘보가 걷는 것처럼  아스팔트를 핥듯 걷던 발걸음은 이내 방향을 전환했다. 회군이라면 너무 거창한  말이려나.



 걷다 보니 도서관이 보였다.  키가 크고 늘씬한 학생들이 잠시 쉬러 나오는지  가을볕에 뽀얀 얼굴이 빛나 보였다.  청춘의  빛깔이었다.  스미듯 도서관 정원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군데군데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가까운 자리에는 머리가 희끗한 분이 앉아계시기에 안쪽으로 가 그늘이 있는 곳에 앉았다. 도서관에 가긴 했지만, 난 그저 쉼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옆자리에는 시험을 앞뒀는지 모녀가 손바닥에 공책을 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또 다른 곳에는 아빠와 딸이 책을 보면서 무슨 얘기인지를 도란도란 나눈다. 물도 마시고 기지개를 켜다 보니 내가 앉은 곳은 등나무 벤치였다. 등나무에는 언제인지 꽃은 지고 콩 열매마냥 기다란 결실이 대롱대롱 있다.  병원도 아닌 도서관에 환자의모습으로 앉아 있자니 느낌이 평소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올 때 봤던 노신사는 뭘 하시나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커피도 마시고 그저 한가로운 모습이다. 엄청 살만한 양반이지 싶다. 한참을 쉬고 뭉게구름도 보고 이 생각 저 생각도 하다 보니 먼발치서 노신사가 주섬주섬 가방을 싸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을 나섰다.


 아!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난 팔이 아파 죽겠다, 죽겠다 하던 참인데 그 양반은 한쪽 다리에 의족을 하고 계신 게 아닌가!  요즘  내내 속이 타던 난 돌연 눈물이 글썽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보다 더한 아니 열 배도 더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을 겪으셨겠구나 싶으니까 도리어 나의 투정이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정신이 버쩍 들었다면 그게 참말이다.



 노신사가 자리를 비우자 그 벤치 앞마당에는 참새들이 수북이 와서 모이를 쪼아 먹는다. 그곳에 가 보니 거기엔 새들의 모이가 뿌려져 있었다.



 한 때 영화롭게 사셨을 법한 그 분은 아마도 새들에게 모이도 주고 남이 알지 못하는 선행을 하면서 자신의 갑작스러운 아픔을 이겨내며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참새들이 대나무 숲 사이에서 속살거리는 걸 뒤로 하고 도서관을 나왔다. 가족들의 만류로 산에는 가지 못했지만, 그 근처 골목길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감나무가 집 크기만 하게 자란 곳도 있고, 능소화가 여기저기 퍼질러져 피어 있는 빈집도, 허물이 벗겨질 대로 벗겨진 집들의 쓸쓸함도 눈에 들었다. 차 한 대도 댈 수 없는 좁은 골목에 지어진 오래된 집들은 삶의 노화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최근 내게 닥쳐온 시련이라면 시련인 팔을 다친 것으로 해서 이것저것 알게 된 바가 있지만, 오늘의 산행 회군으로 새삼 깨닫는 것은 이 또한 지나갈 터인데 어지간히 엄살이 심했다는 것과, 가지런히 다듬어진 화단을 가진 나의 집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이다. 거기다 아직  건강해서 나를  도와줄 가족이 있다는 게 내겐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참새에게 모이를 던져주고 가신 노신사 양반의 마음에 평온이 깃들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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