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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또르쟈니 Oct 14. 2017

홍시

감이 감나무에서 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

 한여름부터 사정이 생겨 다른 운동도 못하고  운신의 폭이 좁아진 입장이라 틈만 나면 아파트 뒤뜰을 걸었다.


 한동안 걷기를 소홀히 하던 사람이 집에 있기 답답하고 통증이 심하고 그럴 때마다 숨통을 틔우는 차원에서 잠시잠시 밖으로 나갔다.


 처음 시작할 무렵에는 여름내 비를 맞고 견딘 옥잠화가 하얀 꽃봉오리를 자랑하며 쪼록쪼록 올라오고 벌개미취 따위가 보랏빛 꽃잎을 드러내며 편한 웃음으로 내 맘을 달래주곤 했다. 그때만 해도 나무들은 온통 초록이기만 했다.  일주일, 보름, 하고 한 달이 되어갈 무렵부터  그 애들 속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감나무에  연초록 민낯을 한 감이 똥글똥글 보이기도 하고 대추나무에 대추가 영양실조 걸린 사람의 얼굴과 흡사하게 희멀겋게 자취를 드러내다가 나에게 들키곤 했다.


 그 사이 해가 뜨고 지고, 비가 내리기도 하고,  덥기도  춥기도 하면서 구월은 여름인지 가을인지  모르게 가버리고 시월이 되었다.


 감은 살이 오를 대로 올라서 통통한 게 그냥도 보기 좋은데 점점 발그레 홍조를 띠기 시작하더니 요즘엔 나무에 온통 등불을 달아 놓은 듯 꽃으로 피어났다.  튼실한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걸 올려다보면서 산책을  하다 보면 어떤 때는 고개가 뻐근해지는 걸 알아채고 목 돌리기 운동을 한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해가 따끈하게 대지를 덥히고 감나무에도  깔끔하고 밝게 비치던 날, 햇빛이라도 좀 쬐어야겠다 하고 나서던 때였다.  그래도 왔다 갔다 열 번은 하고 돌아올 생각으로 나갔는데 발을 몇 발자국도 떼지 않아 갑자기 내 앞에서 주먹만 한 홍시가  툭하고 떨어지는 게 아닌가.


 "어머나 " 하고 놀라며 아무도 없는 것 같았지만 누가 볼세라  얼른 달려들어 홍시를 집었다.

홍시는 몇 개 가로줄을  내고 약간만 깨졌을 뿐  별 손색이 없고 깨진  틈으로 보이는 속살에서는 영근 가을 냄새가 흠씬 코를 적셨다.


 두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곧장 들고 들어가 남편에게 자랑을 하고 싶어서 그냥 여유를 부리며 산책을 할 수가 없었다.  깨진 홍시가  더 어떻게 될까 봐 조심조심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현관키 번호를 어렵사리 기억해 낸  다음 문을 활짝 열었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 여보. 여보!   이거 좀 봐.   홍시 좀 봐.   이게 있잖아.   내가 뒤뜰에서 걸으려는데 몇 발자국 가지도 않아서 앞에서  덕!  하고 떨어지잖아.  쳐다봐.  냄새 좀 맡아봐.  정말 크고 잘 생겼지?"


 " 어! 벌써 감이 이렇게 익었단 말이야.  진짜 홍시네.  야 냄새 좋다. "



 아직 떫은 게 남아있을지 몰라 하루를 냉장고에  묵힌 다음 우리는 둘이서 그것을 맛나게 나누어 먹었다.


 

요즘 아이들이야  홍시에 대한 추억이  그리 많지 않겠지만, 우린 어릴 적부터 과자보다는 홍시와 친했다.   가을이면 무엇보다 달달한 게 우리네 입을 즐겁게 해주던 최상의 간식이었다. 그래서  더욱 뒤뜰에서 얻게 된 홍시는 쿨쿨했던  나의 가을 나기에서 생긴 굉장한 기쁨조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우리 속담에 "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 바란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속뜻은 본인이 노력하지 않고 어디서 요행이 오기를 바라는 사람을 일깨우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나처럼 우연히 떨어진 홍시를 보고 줍고 그것을 냉장고에  숙성시킨 후 내 소중한 남편과 둘이서 사이좋게  나눠 먹어본 사람은 결코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바라는 요행수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지도 모른다.


  뒤뜰에는 온통 쟤네들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감나무에 탐스럽고 맛나게 생긴  벌건 홍시가  한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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