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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또르쟈니 Mar 02. 2018

나의 오래된 선생님

꽃꽂이 전시회를  다녀와서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새벽에 깊이 잠들지 못하고 3일 동안이나  같이 지내던 선생님을 떠올리느라 뒤척대고 있었다.


 나의 오래된 꽃꽂이 선생님은 한창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을 다니고 있을 때 만났다. 그때는 꽃꽂이하는 사람이 많았다. 신부수업을 하는 사람도 그렇고 얌전한 부인네들도,  직장인들도, 너도나도  꽃꽂이를 배웠다. 그때는 꽃꽂이,  뜨개질,  서예,  산수화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외에도 더러 다른 취미생활을 할 거리가 있기도 했지만,  난 그때 유독 꽃꽂이에 끌렸다.


 어느 날 출근을 하느라 한 약국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약국 안에  피어있는 보랏빛 도라지가 고목나무 위에서 고혹적으로 웃고 있었다.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약국 앞을 지날 때마다  곁눈질로 내 맘을 당기는 그 꽃을  몰래  훔쳐보기 시작했다.


 내 속 마음을 눈치챘을 리가 없을텐데 옆의  동료가 꽃 수업을 들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이것저것 생각하자니 내게는 벅찬 취미활동임이 분명했다. 집은 셋방살이이고, 월급은 아주 쪼개 쓰지 않으면  일껏 빠듯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짬짬  하지 않고 수업을 듣기로 했다. 그러던 몇 주후 가정집에서 하는  수업도 많았던 터라 소개받은  주택의 대문을 열고  계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온화해 보이는 분이 우리를 반긴다.  "안녕하세요?" 서로 통성명을 하긴 했지만 처음엔 큰  느낌도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연의 끈은  30년이 다 되어 가도록 두 사람을 가두었다.   


 지금은  회장님으로 모시지만  그때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조용히 따랐다.  회장님과 만나면서  한 번도  내 속내를  드러낸 일도 없고 서로를  더 알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저 느낌 가는 대로 마음 닿는 대로 해 왔다. 잘해  드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힘들면 그저  나 혼자  살아내느라  애를 썼고,  회장님 또한 당신이 아프고  힘이  들었어도  크게 내색하지 않고 견뎌 내셨다.


  꽃꽂이를 하는 사람으로서 듣기 거북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식물의 생식기를 모질게 잘라다가 꽃꽂이인지 뭣인지를 한다고 째를 부리는 여인네들을 보면 때로는 역겹기도 하고, 참 할 일도 없다고 일갈하는 사람들도  있는 걸  안다. 그 말도 일리는 있다.


 그렇지만  모르는 것이 있다.  나 같은 경우 열악한  환경에서 살면서  자물쇠가 비에 젖어 녹이 슨 문을 열고, 내 집이라고 찾아  들어갈 때 내가 꽂아둔  꽃 몇 송이가  빈한한 도시 생활에서의 내게 다소나마  웃음을 갖게  했고, 자존감이라는 걸  살려 주기도  했다. 그래서였는지 집칸을 늘려 갈 때까지  잘 버틸 수 있었다.  그런 다음에도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를 키우자니 밖을  자주 나갈 수가 있나,  누구랑 자주 소통할 수가  있나,  산후  우울증  걸리기 딱 좋은 시기일 때도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빼놓지 않고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셨다.

아이 셋을 키우다 보니 집이 난장판이 되어 있곤 했다.   그때마다 지친 나는 절인 파처럼 되어 있다가도 선생님 오실 시간이면 득달같이 창문을 열고  청소도 하고 화초에 물을 주기도 하였다.   덩달아 나도 씻고 옷매무새를  갖추려고 동당거렸다. 처음엔 나만 공부했지만, 점점  이웃집 사람들도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엄마들도 같이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니 일주일마다 손님이 오니 자연히 내 집을 꾸미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나른하게  지내지는 않게 되었다.  그러자니 선생님과의 수업시간은  요즘 사람들이 많이 먹는 비타민 역할을 해 주었다. 목소리도 크지  않으신 분이 속으로는 아주 능동적인 면이 있으셨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 생각에 가끔씩 맛난 빵을 사 오시기도 했다.  난 핫케익을  만들기도 하고 별 재주는 없지만, 약간의 간식거리를 준비해 보기도 하면서 느린 편에는 부지런을 피웠다.


 사실 도시생활에서 외롭고 고단한 나에게 선생님은 따뜻한  사랑꾼이셨다.  그저 받기만 하고  그냥 원래부터 어른들은 그러는 거구나 하고  당연하게  여기며 살던 어느 날, 바깥 선생님께서 퇴직을 하셨다면서,  선생님을 차에 태워 같이 오셨다.  너무 반갑고 부럽고 또 부끄럽기도 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날 이후로  그 분과의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 바깥 선생님은 다음 해 봄 낚시를 가셨다가  패혈증으로 먼 길로 가셨다.



 한참을 무심히 지냈는데 바깥 선생님 떠나시고 십여 년이 되었을 무렵에야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동안 말은 못 하였지만, 실은 우울감에 시달리며  살아왔다고 말이다. 집안 언니들이 이러다 죽겠다며 경기도로 불러들이는 바람이 이사를 하셨다.  



 며칠 전 전시회를 앞두고 선생님께서는 운동만 하러 다녔더니 마땅히 입고 갈 옷이 없다며,  옷 사는 것을 봐줄 수 있겠냐고 물으셨다. 입성이  그렇겠구나 싶어 깨끗한 옷집으로 모시고 갔다. 그중 제일 고급지고 멋들어진 것으로  사시게 했다. 물론 내가 한턱 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도 동행해준 것이 고맙고

 오랜 시간 같이 있어주어 고맙고

 거기다 예쁜 걸 골라줘서 고맙고

이 양반은 도무지 안 고마운  것이 없는 분이다.



 전시회를 보러 온 한 친구와 같이 있을 때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살다 보니"좋아질 거야.   그래 다 잘될 거야. " 왠지 뭔가 기쁜 일이 생길 거야. "하고 기대를  하며 살다 보면,  정말이지 좋은 일이 생길 뿐만 아니라,

내게도

내 남편에게도

내 가족에게도

내 이웃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는 것 같다고 하신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당신은 날마다를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곧추 세우려고 매번 자기 최면을 걸었다고 하신다.



 내일모레 팔순을 앞둔 선생님의  살아오신 날들에  대하여 또한 나와 맺은 인연에  대해서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는다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봄밤 잠못이루며 써 본다.



  잠시 꽃꽂이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오래도록 공부를 해오긴 했지만,  그 일은 꽃마음을 지녔거나 아니면 꽃마음이 되고자 하거나 그런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고단한 작업이다.

생각에는 예쁘기만 할 것 같지만, 작업을 하다 보면 꽃을 꽂을 때는 가위로 자르기도 힘들고, 장미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무거운 화기를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어서, 도대체가 3D업종에 속한다고 말해도 거짓된 말이 아니다.  거기다 꽃 설거지는 어떤가.  지저분하고 냄새도 나고...



  그러나 이런 것도 있다.  꽃을 꽂아서 식탁이나 탁자에 어울리게 놓자면, 그 주변을 정갈하게 정돈하지 않으면  오히려 지저분하기만 하다.   그래서 탁자도 깨끗하게 닦고 집안도 어수선한지 살펴보고, 하다 보면  느른해지지가 않는다.  거기다 예쁘게 핀 꽃이 시들세라 분무기로 슉슉 물을 뿌려줄 때면 얘들이 상큼 발랄하게 웃어주기도 한다. 그 예쁜 것이야 말로 하기에는 떨려서  어려웁다.  즐거움 중에는 별것도 다 있다.  꽃 설거지를 할 때 화기를 깨끗하게 닦아 정리를 하게 되는데 그때 묵지근한 것을 들마시할때  느껴지는 개운함은 겪어야만 알 수 있는 짜릿함이 있다.  참 즐겨봄직한 부분이다.   



 봄이 와서 꽃들이 지천에 온통 피어있을 때는  전시회를 잘 하지 않는다.   봄이 오려는 길목에서  애타게 봄을 기다릴 때에  하는 전시회의 맛에는  먼저 성급하게 봄을 느끼려는 아낙들의 욕심이 들어있기도 하다.   그게 뭐 이상한가.



 어쨌든 선생님과 나는 오래도록 꽃마음으로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강퍅한 삶을 살아버렸을지도 모르는 내게 평온한 오늘을 살아갈 수 있게 길을 터주신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어느 날 문득 관심이 가고 끌리는 것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다가가서 두 번 없는  내 삶에 자양분이 되어줄 그 무엇과 친해져 보라고 권하고 싶다.  끌림으로 다가간  그 어떤 것으로 인하여 내 오래된 선생님 같은 인연을 만날지도  혹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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