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문
꽃의 언덕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며 하이디가 내려올 것 같았다. 꿈에 그리기만 하던 스위스 땅에 발을 딛었을 때의 감동은 내게 "너는 창조주를 믿느냐?" 하고 누가 묻는다면 " 예. 저는 창조주를 믿나이다. " 하고 바로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서게 했다. 가슴 안까지 다가오는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 작달막한 꽃들의 합창, 설산이 겹쳐 보이는 레만호의 도도함.
가기 전 엉켜 있던 마음은 삽시간에 눈 녹듯 녹아버렸다. 낯선 사람들과의 여행이라 두려움도 컸고, 유럽이라는 먼 거리로의 여행을 가족과 동행하지 않고 떠나는 것이 맘을 복잡하게 했다. 이번만큼은 집을 떠난다는 것이 죽는 연습, 종착역으로 떠나는 한 과정은 아닌가 하고 속으로부터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행을 가서 살펴보니까 다들 각 개인이 온 건 나와 입장이 다르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아름다운 스위스의 산천은 나의 모든 경계심을 풀어 버렸다. 곳곳에 펼쳐진 들꽃의 향연은 안개비가 자욱한 니기산 자락에 온통 펼쳐져 있었다. 산악기차를 타고 오르는 내내 사람들은 " 와와~~~" 연신 신음하듯 놀라워했다.
이국적인 정경들,
다소 감당이 어려운 현지식,
여러 나라 사람이 모인
관광의 나라 스위스는 다 예뻤다.
온천욕을 하고 같이 간 일행들과 재미나게 물놀이도 하고, 여기저기 좋은 곳을 찾아다녔다. 자동판매기처럼 정해진대로 가이드가 가는 쪽으로만 따라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레만호에 가는 날 아침에는 특별히 원피스를 차려입었다. 왠지 근사해 보이고 싶어서였다. 이유인즉슨 아주 오래전 <레만호에 지다>라는 드라마에서 배우 정애리씨가 바바리코트를 입고 호수 저 끝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그녀는 그때 한 공산당 간부 역을 맡고 있었다. 공산당이라면 무조건 오금이 저리던 시절이었는데도 그 모습이 너무나 고독해 보여서 공포스럽다기보다는 아름답기만 했다. 내가 언젠가는 저곳에 서 보리라 하고 마음만 먹었던 곳인데, 그게 현실이 되었으니 원피스 정도 차려입는 것은, 동경해왔던 한 장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정도에 속하리라고 생각했나 보다. 스카프 하나를 더 해서 제 멋에 겨운 여행의 진수를 즐겼다.
5박 7일의 여행 중 넷째 날이었을 것이다. 그 날은 비가 내렸다 자유시간이 주어졌을 때 짝꿍과 둘이서 마테호른을 보겠다고 샛강을 따라 올라갔다. 난 외국어라면 소름이 끼치는 사람이지만, 짝꿍은 달랐다. 키도 크고 코도 높은 사내에게 저기가 마테호른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거기는 뒤쪽이라며 돌아서 가야 정면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우중에 어렵사리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우산을 켤까 했을 때 해가 삐끔 비치기 시작했다. 다시 산악열차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곳마다에서 우리는 또 소리소리를 질렀다.
성냥갑처럼 놓여진 집들,
몸을 내려놓은 삼나무,
초원과 대비되는 설산,
열차에서 내리자, 마테호른은 구름 치마를 입고 있어서 좀처럼 제 모습을 보이려들 질 않았다. 듣기로 아주 맑은 날에나 볼 수 있다고 했다.
내려올 때는 걷기로 했다. 눈앞에는 설산과 빙하가 있는데, 우리가 걷는 발길 사이에는 이제 싹이 튼 에델바이스와 진한 보랏빛의 알 수 없는 꽃, 여러 가지 다육이 식물이 땅에 딱 붙어서 자라고 있다니 신기할 뿐이었다. 거기다 집채만 한 눈무덤 밑으로는, 강한 힘을 자랑하는 켈트족 전사들의 군화소리처럼, 저럭저럭 소리를 내며,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걸으면서 마테호른 꼭대기를 담아 보려고 기를 쓰고 사진을 찍었다. 그때 산 위로 펼쳐진 하얀 구름과 바다보다 진한 빛깔의 하늘은 곧바로 내게 반성문을 쓰게 했다.
" 저는 창조주를 믿나이다.
가족들에게 볼상 사납게도
까칠하게 굴고
여행을 떠나 왔습니다.
창조주여!
늘 부족한 저를 용서하소서.
진실로 장엄한 천지 앞에서
당신의 천지 창조하심을
믿고 또 믿나이다.
제게 삶의 지혜를 주시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총명과 건강을 허락하소서!
꿈의 나라 스위스에
올 수 있는 복을 제게 내리셨으니,
저도 세상에 이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창조주여!
진실로 부끄러웠던,
작고 또 소심했던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세상 앞에 멋진 한 사람으로
잘 살아낼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장엄한 삼라만상 앞에서
저절로 뉘우침과 기도가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가까이 같이 지낸
열 명의 일행들에게서는
단합. 양보. 배려. 아낌. 보살핌. 사랑을 배웠으며,
조금도 모나지 않은 그녀들의 어짐에
여행은 내내
그 맛을 더 했다.
다 살아온 날들에 대한
반성문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