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힐링푸드를 소개합니다
잔치국수는 어쩜 이름도 잔치국수이다. 말 그대로 잔칫날 손님을 대접하는 대표적인 음식으로 나름 호사스러운 음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결혼식 뷔페에 구색 맞추기로 넣기야 하지만 하객들의 손에 잘 닿지 않는 비인기 메뉴 중 하나이다. 그럼, 요즘 잔칫날에 먹을게 얼마나 많은데. 스테이크부터 회, 갈비찜, 초밥 등등 굳이 국수로 배를 채울 이유가 없다. 내가 낸 축의금의 뽕을 뽑기에는 적당한 값어치의 음식이 아니다. 게다가 국수로 채운 배는 금방 꺼지기까지. 누군가에게는 먹었는데 먹은 것 같지 않은, 배는 안찼는데 칼로리만 차는 괘씸한 음식일 수도 있다.
그런 잔치국수가 미치도록 먹고 싶고, 미치도록 소중해지는 날이 있다.
바로 하루 종일 회사 일로 스트레스가 몰아치는 날! 아침부터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클라이언트 때문에 속이 문드러지고, 여기저기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실컷 수습 다하고 나면 이렇게 열심히 하고 좋은 성과를 내도 알아주지 않는 회사가 야속해지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퇴사가 답이지 않나 고민하다가 맞다, 나 갈 곳이 없지.라는 결론에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는 그런 뻔하디 뻔한 날 말이다.
이런 날에는 이상하게 말이지. 파란색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 잔치국수 한 그릇을 딱 두고 소주 한 잔을 곁들이고 싶다. 분위기는 너무 깔끔한 곳 말고 주황색 천막으로 감싼 포장마차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고.
나도 평소에 술 한잔 하고 싶을 땐, 평범하게 고기나 회에 소주를 먼저 찾고 이게 좀 질린다 싶으면 파스타 혹은 치즈에 와인 조합이 떠오르는 사람이다. 기본적으론 이쪽이 더 취향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회사 때문에 짜증 나고 회사 때문에 답답하고, 또 회사 때문에 슬퍼지는 날에는 저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날 힘들게 하는 스트레스 따위에게 너무 과분한 상을 주고 싶지 않은 기분이랄까. 가슴 속에 묵직하게 쌓인 회사 욕을 뱉으면서 술 한 잔 하고 싶을 때. 그저 잔치국수 한 그릇이면 딱 좋겠다 싶은 그런 기분.
그런데 이렇게 실컷 떠들어봐도 '그래서 말이야. 왜 하필 잔치국수인 건데?' 하는 의문에는 말문이 막혔다.
왜 모르겠어? 딱 봐도 잔치국수여야 하는데?라고 말하고 나면 순간 모두의 머리 위에 떠다니는 물음표. 나 역시 개운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대화를 왜 나눠야 하는지부터가 사실 의문이지만- 아무튼 난 진짜 이런 날엔 그냥 잔치국수라고! 일단 우기고 본다.
그러다 며칠 전, 이런 내 마음을 기가 막히게 눈치챈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고 말았다. 도대체 이 장면을 쓴 작가는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게 아닐까? 감탄과 물개 박수가 절로 나왔다.
요즘 방영 중인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에서 극 중 드라마 작가인 진주(천우희)와 PD인 범수(안재홍)가 방송 편성을 위한 PT를 시원하게 말아먹고 터덜터덜 걸어 나온다. 방송국 간부들에게 기가 쪽쪽 빨린 이 둘이 저녁을 먹자며 나누는 대화를 슬쩍 가져와 봤다.
-든든하게 먹었는데 정말 진이 쪽 빠졌나 봐요. 밥 먹어요 우리.
-내가 밥 먹을 자격이 되나 모르겠네.
-밥 먹는데 무슨 자격을 따져요.
-그게 양심이다 하고 올드한 생각을 해봤어요.
-그럼 싼 거 먹어요 싼 거.
-오늘은 뭔가 직장인이 돼서 상사한테 실컷 깨지고 난 느낌이니까. 포장마차 잔치국수 어때요?
다음 장면에서는 내가 원하던 모습 그대로 파란색 플라스틱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는 둘이 보인다. 그리고 잔치국수를 한입 후루룩 하자마자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여기에 소주까지 곁들이면 이긴 기분이 들 것 같다고 한다. 그렇게 잔치국수 한 그릇 씩, 소주 일 병씩을 해치운다. 멋있게.
맞다. 이거면 되는 거다. 잔치국수 한 그릇이면 이렇게 금방, 행복한 얼굴이 될 수 있다.
진주와 범수가 잔치국수를 찾게 되는 과정, 잔치국수를 먹으며 결국 해피해진다는 결말까지. 정말이지 완벽한 서사다.
사실 나는 내가 비싼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돼서 잔치국수를 찾는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나의 스트레스가 비싼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저 잔치국수 한 그릇과 소주 한잔에 쉽게도 찾아오는 행복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오늘 하루, 회사 때문에 너무 힘들고 지쳤지만 그런 고단함이 별 거 없는 잔치국수 한 젓가락에 순식간에 사라진다. 뭐 특별한 맛도 아니고 다들 아는 그 맛이다. 멸치 향이 진하게 나는 시원한 국물에 쫀득한 소면, 수북이 쌓인 김가루와 깨가 어우러져 내는 적당히 고소하고 짭짤한 맛. 그리고 곁들이는 소주 한 잔이면 적당히 알딸딸해진 얼굴로 정말이지 '다 이겨버린' 듯한 기분이 된다.
이렇게 한 그릇 시원하게 비워내면, 자꾸만 날 바닥으로 끌어내리던 스트레스도 함께 비워지고 다시 별 것 없는 하루로 돌아간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5천 원짜리 음식 한 그릇으로 이런 행복을 얻는 게 쉬울까.
최고의 가성비, 최고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특히 잔치국수가 자주 생각난다. 회사에 서운한 게 많고 자주 슬퍼서. -6년째 미운 정 고운 정 많이 들어서인지 화가 나기보다 슬프다는 감정이 앞서는 이상한 회사다- 자주 잔치국수를 먹으면서 자꾸만 쌓이는 감정과 스트레스를 비워내야 한다. 그게 요즘은 나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토록 소소하기 짝이 없지만 나의 잔치국수는 너무나 사랑스럽다.
슬프게도 이제는 주변에서 포장마차 찾기가 어렵다. 간신히 찾아도 우동만 팔더라.
찾아오는 서늘한 가을에는 포장마차에서 개운한 잔치국수 한 그릇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