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과 통보는 매우 다릅니다만
해가 바뀌어 어느덧 삼십 대 중반에 들어서게 되었다. 쳐지는 피부, 떨어지는 체력, 늘어나는 뱃살을 훈장처럼 떠안으며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도 벌써 10년 차. 이제는 시간이 조금 천천히 갔으면 싶기도 한데, 다행히 직장인으로서 새해가 오는 게 반가운 이유가 딱 한 가지 있다.
'연봉협상'
아마도 이미 협상을 마치고 새로운 월급을 받아 들었거나, 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우리 회사는 회계기준이 3월이라 보통 2월 마지막 주에 연봉협상에 돌입한다. 그런데 나는 이 '연봉협상'에 늘 의문이 하나 있었는데, 왜 '협상'이라는 단어가 붙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직장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협상'을 통해 연봉이 책정된 적이 없었다.
나는 늘 연봉을 '통보'받았다.
사회생활 1년 차에야 뭐, 당연하게도 연봉협상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애초에 나에겐 연봉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6개월간 월급 100만 원이 나의 근로조건이었으니까. 그렇게 1년을 잘 버텨내고 찾아온 첫 연봉 협상은 나의 기대와는 달리, '메신저'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팀장은 그때까지도 나에게 회사의 연봉 기준은 어떻게 되는지, 지금 받고 있는 월급에 대한 나의 의견 같은 건 알려주지도 물어오지도 않았다. 시즌을 맞이해 내가 그런 얘기를 꺼내려고만 해도 말을 돌렸다. 그리고는 내 연봉을 본인이 대표님과 이야기하고 와서 메신저로 통보해주는 게 전부였다. "다음 달부턴 월급이 000만 원으로 나갈 거야." 이런 식의 통보.
직접 대면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메신저로 통보를 해왔던 건, 내 의견 따위는 듣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어렵게 꺼낸 업무강도에 비해 월급이 적다는 말은 이런저런 핑계로 막혀버렸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도 팀장은 내 연봉을 메신저로 통보해주었다. 그것이 내가 첫 회사에서 경험한 연봉 협상의 전부였다. 그래도 그땐 이 회사의 특성이겠거니 했다. 업계가 워낙 직원 처우가 좋지 않으니까 그러려니 해버리고 말았다.
보통 이직을 하면서 연봉을 20% 이상 올린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 역시 나는 해당되지 않았다. 아예 업계를 떠나 이직하게 되었고 이직할 회사 후보 두 군데 중 한 곳은 이전 경력을 마음에 들어했으나, 이를 감안해 연봉을 줄 수는 없다는 아이러니한 말을 했다. 그래서 다른 후보였던 지금의 회사로 옮기게 된 것이었고 경력을 인정받았지만 연봉 자체는 이전과 동일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나는 경력을 인정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연봉에 대한 어필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근로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새로운 회사에서의 시작에도 역시 협상은 없었다.
그러니 지금 회사에서 첫 연봉 협상을 앞두고는 얼마나 긴장을 했겠는가. 약 한 달 전부터 틈만 나면 나름의 대비를 했다. 내가 작년 한 해 동안 어떤 성과들을 냈는지 정리했고 , 앞으로는 어떤 역할을 더 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고민했다. 받고 싶은 연봉도 대략적으로 생각해 두었다. 많이 늦었지만 사실상 첫 연봉협상에 거는 기대도 컸고 긴장도 많이 되었다. 매일 여러 번, 내용을 곱씹으며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어필하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맞이한 나의 첫 연봉협상은 1분 만에 끝이 났다.
대표님과 마주 앉자마자 내 앞으로 '연봉 계약서'와 함께 펜이 내밀어졌고, 이미 나의 새로운 연봉이 고딕체로 인쇄되어 있었다. 수정의 여지는 없다는 듯이.
일 년 동안 고생 많았다는 인사와 함께 아래 서명을 하라는 친절한 말씀이 이어졌고, 나는 딱 한 마디 하고 나왔다.
"네. 감사합니다."
... 흠. 이래서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나 보다.
써놓고 보니 내가 무척 바보처럼 느껴지지만, 나 역시 유독 저 자리에서는 왜 그리 되는지 궁금하다. 물론, 회사에서는 모든 직원에게 이런 식으로 연봉이 통보된다. 다들 본인 순서에 들어가서는 5분도 안되어 종이 한 장을 들고 털레털레 걸어 나온다. 대부분 나와 같은 표정을 하고선.
이러니 연봉 협상이란 말은 대체 왜 쓰는 건지 모르겠다. 본래 '협상'이라는 단어는 논의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인데...
누구, 제 연봉에 대해 논의하신 분?
솔직히 말해, 회사와 '협상'을 한다고 해서 연봉을 얼마나 더 올릴 수 있겠는가. 대기업, 중견기업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작은 회사의 사정이야 직원들이 더 빤히 알고 있다. 게다가 회사가 어려워져 연봉 동결을 거쳐본 적도 있는지라, 사실 올려주는 것만으로 감사하기도 하고.
그러니 연봉 '통보'에 아쉬운 이유는 액수의 문제라기보다 소통의 문제인 것도 같다.
내가 이 연봉을 받게 되는 이유에 대해 납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쏙 빠져있으니까.
일 년간 영혼을 갈며 일한 대가로, 계산식도 모르는 채 나온 숫자를 정답이라 받아들이는 일이 유쾌할 사람은 없다.
아직 멀었지만 한 달 뒤쯤엔, 지금 회사에서 맞이하는 일곱 번째 연봉 협상이 있을 예정이다. 2019년 한 해동안 회사 내에서 특히, 우리 팀의 역할이 상당히 커졌고 그 부담을 안은 채로 좋은 성과도 많이 냈다. 모두 열심히 달린 만큼 매출도 많이 회복되었으니 올해도 동결을 얘기하진 않을 테고...
그래서 이번에야 말로 통보받고 싶지 않다.
연봉 협상, 이제는 한 번 해보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