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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 Jul 13. 2020

늘어나는 새치만큼 엄마를 이해하게 돼

엄마는 왜 딸에게 염색을 부탁했을까?

한 두 달에 한번 미용실에 가서 새치염색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자라나는 뿌리를 못 견디고 셀프로 새치염색을 한 번 또 한다. 작년부터였나. 염색 주기가 급속도로 빨라졌다. 그렇다 해도 아직 삼십 대 중반인데. 흰머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서글퍼지고 울적해진다. 나이 듦이야 뭐 어쩔 수 없는 건데 그 징표가 너무 뚜렷이 보이는 게 참 거슬린단 말이지. 안 보이는 데로 서서히 와주면 안 될까? 내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새치 좀 있으면 어때 싶어서 그냥 둬보기도 했는데... 이게 또 하필이면 정수리 쪽에 한 평 정도의 밭을 꾸리고 있어서 어쩔 도리가 없다. 내 흰머리에 사람들 놀라는 소리는 아직 익숙해지지가 않아서.


-아니,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흰머리가 많아?

-어? 여기 흰머리 있다!


왜 타인의 흰머리를 발견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큰 소리로 말하는지 모르겠다. 어디 신대륙 하나 발견한 것처럼 기뻐하며 자신의 발견을 우렁차게 알린다. 저기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거든요. 쉿! 진짜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 같은 새치 보유자들은 자신의 새치 현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아무튼 그래서 나는 어제도 밤 10시에 염색약 1제와 2제를 열심히 섞어 바를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이 정도 염색약은 쟁여두잖아요?






나는 유명한 똥손이지만 염색 실력은 수준급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사실이 그렇다. 일단, 경력이 먹어준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염색을 시작했으니까 벌써 십수 년은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때부터 새치가 많았던 것은 아녔고 바로 엄마의 새치를 염색해주었던 게 그때부터였다. 아마 내가 중3 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우리 엄마 나이는 기껏해야 마흔 정도였는데 그때 이미 지금의 나처럼, 미용실에 가서 염색하던 게 더 이상 감당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그 시절은 지금처럼 혼자 염색하기 좋게 약이 잘 나오던 때가 아니었기에,  똥손 오브 똥손인 우리 엄마는 어린 나에게 염색 붓을 넘겨주었다.

 

짐작컨데, 나의 새치는 엄마에게 물려받은 것이고 엄마는 엄마의 엄마에게 물려받은 것일 테다. 과학적인 증명까진 모르겠지만... 엄마를 비롯해 이모 넷이 50대에 백발이 된 걸 보면 맞지 않을까?

슬프게도 나의 미래의 모습일 테고.


백발이 어울렸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한창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암모니아 냄새 풀풀 풍기는 염색약을 들고 오는 엄마가 너무 싫었다. 그깟 염색, 얼마나 한다고 미용실에 가면 되지. 아직 어린 딸에게 부탁을 할까.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다. 친구들 중에 엄마가 염색을 맡긴다는 이야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기에 창피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크게 시간을 빼앗기거나 노동이 필요한 일도, 엄청난 기술이 필요한 일도 아니기에 못해줄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할 만큼 싫었다. 아직 젊은 엄마의 흰머리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서 불길이 일고는 했다. 사춘기여서 그랬을까?

그렇게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엔 꼬박꼬박 염색을 해주었다. 엄마는 엄마의 작은 머리통을 채운 새치들이 나랑 동생 키우느라 고생해서 솟아난 거라고 늘 말씀하셨으니까. 그러면 나는 또 금세 미안해져서 열심히 염색약을 바르고 또 덧발라댔다.


우리 모녀는 같은 암모니아 냄새를 킁킁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비록 엄마는 나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고 나는 엄마의 정수리를 보고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염색약을 바를 동안 강제로 붙어 있어야 했으니까. 가족보다 친구들이 더 좋고 TV에 나오는 오빠들이 더 좋았던 나였지만 그때만큼은 엄마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염색약이 핸드폰에 묻으면 안 되니까 핸드폰도 볼 수 없었고. 그렇게 엄마와 나는 '염색'을 빌미로 모처럼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방치 시간이 지나고 머리를 감고 나오면 엄마는 꼭 오늘은 여기가 잘 안됐네. 이마에 묻었네. 오늘은 까맣게 잘됐네. 어쩌네 평가를 남겼다. 그리고는 고생했다며 만 원짜리 두 세장을 손에 쥐어 주셨다. '그 돈이면 그냥 미용실 가서 하겠네.' 받은 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늘 했던 생각이다.






엄마의 전담 염색사로의 활약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끝이 났다. 그때부턴 내가 엄마에게 먼저 염색을 해준다고 해도 정색을 하며 싫다고 하시더라. 이제 다 큰 딸에게 이런 거 시키지 않을 거라고. 미용실 가서 할 거라고. 진짜로 엄마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나에게 염색을 맡기지 않았다. 미용실 가서 염색을 하거나 집에서 직접 하셨다. 놀랍게도 엄마는 염색을 혼자서도 아주 자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건 뭐. 유주얼 서스펙트의 절름발이 정도의 반전이 아닐 리가.


그렇게 어느덧, 나는 내 머리를 직접 염색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거울 앞에서 염색약을 바르다 보면 때때로 내 얼굴에서 엄마의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던 사춘기 소녀가 보인다. 그 젊은 나이의 엄마는 (유전이긴 하지만) 자식들 키우며 얻은 새치가 성성한 당신의 머리를 보며 어떤 기분이었을까. 어린 딸에게 머리를 맡기고 있을 때의 기분은 또 어떻고. 그걸 빌미로라도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좋았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괜스레 마음이 울컥거린다. 그때는 알고 싶지도 않았고 평생 알 수 없을 것만 같던 엄마의 마음을 새치 염색하다 말고 알아가다니.

정말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이제는 허연 뿌리가 몇 센티씩 자라나 있어도 바로바로 염색하지 않는 엄마. 그걸 보는 나는 또 마음이 좋지 않아서 괜히, 미용실 좀 가라며 타박하는 걸로 안부 인사를 대신한다. 지금은 엄마가 극구 거부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미용실에 나란히 앉아 새치 염색을 받아야지. 나올 때 결제는 내가.

생각만 해도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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