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왜 자연인이 되려고 해요?” 진눈깨비가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대전역 8번 플랫폼. 아빠와 나는 선로 건너편에 있는 이름 모를 산을 나란히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우리 아빠만 다른 기차를 타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만큼 여느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설렘 또는 들뜸과 같은 단어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의 공기처럼 깨질듯한 적막을 깨고 아빠가 입을 열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사는 게 사람들의 로망이잖아.” 아빠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다시 산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적절한 답변이 될 수 없음을 아는 눈치였다.
자연인이 된다 했다. ‘슈퍼스타 K’를 보며 연예인을 꿈꾸던 남동생처럼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며 필기하는 아빠의 모습이 낯설어 일부러 외면하곤 했다. 그런데 ‘허각’ 같은 가창력도, ‘존박’ 같은 얼굴도 없음을 깨닫고 일찌감치 포기한 동생과 달리 아빠의 준비는 일사천리 진행됐다. 타고 다니던 승용차를 팔았다. 훗날 자가용이 필요하다면 ‘모닝’ 같은 아담한 소형차를 산다 했다. 집도 내놓았다. 혼자 살 수 있는 조립식 주택을 구입하고 남은 돈은 생활비로 사용한다 했다. 그렇게 정년퇴직을 한 지 1년째 되는 날, 아빠는 자신의 몸 만한 배낭을 짊어지고 기차 앞에 서 있었다.
“아빠, 진짜 왜 가는 거예요?” 우리 앞에 펼쳐진 기나긴 선로. 어쩌면 이 사람이 그리고 이 시간이 멀어지는 기차처럼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겁이나, 재차 되물었다. 아빠는 버퍼링이 필요한 듯 크게 한숨을 들이켜곤 이내 말을 이어갔다. “회사에 다닐 때는 생활비가 나오고 그걸로 가정을 가꾸고 하면서 살았는데… 은퇴하고 나서 사회생활을 하려면은 경비라든지 청소부라든지 그런 거 말고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나? 도시에 남아서 뭘 하겠어? 집에도 눈치 보여, 밖에 나가도 제대로 된 직장 없어. 은퇴라는 건 더 이상 사회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뜻이잖아.” 아빠는 자신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는데, 단 하나의 문장도 허투루 흘릴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설움이 느껴졌다.
‘2024년까지 700만 베이붐 세대 은퇴… 청년 실업만큼 심각한 중년 실업’ 얼마 전, 기사를 읽은 적 있다. TV나 신문으로 읽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렇듯, 남일처럼 읽고 흘렸는데 알고 보니 700만이라는 숫자에 아빠도 포함돼 있었나 보다. ‘퇴직 후 우여곡절 끝에 경비원으로 취직했는데 이마저도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는 3개월짜리 계약직이다.’ ‘60세 이상 노동자의 평균 소득은 60만 1000원으로 전년 대비 10만 8000원이나 줄었다.’ 나는 그제야 기사의 문장들을 곱씹어보기 시작했고, 비로소 아빠의 선택은 로망이 아니라 현실임을 깨달았다.
“산천행, 산천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수많은 상념들이 얽히고설켜 내 머릿속을 뒤집어 놓았을 때, 아빠는 이미 기차에 올라 있었다. 기차가 커서일까, 아니면 아빠가 맨 가방이 커서일까, 평소 큰 산처럼 느껴졌던 아빠는 온데 간데없고, 도움이 필요한 여린 소년이 한 명 보였다. 아빠라는 스크린도어 속에서 살아온 지 근 30년. 나는 생각했다. 과연 아빠의 인생에는 스크린도어가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