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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욱근 Mar 23. 2020

진희 씨의 퀴어문화축제


        

벌써 30년 전의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중국으로 출장을 떠난 후 홀로 철부지 아이 셋을 감당하기 버거웠던 어머니는 저를 할머니 댁에 맡기셨습니다. 불과 2개월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탓에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진 않지만 제가 다닐 새로운 학교는 운동장 한편에 금방이라도 로봇으로 변신할 것 같은 웅장한 트랙터가 세워져 있는 시골학교였습니다. 또 기억에 남는 장면은 교실에 첫발을 내딛기 직전, 담임 선생님이셨던 허경숙 선생님은 나보다 보름 정도 먼저 들어온 친구가 있다며 친하게 지내라는 말씀을 해주신 것. 그런데 저는 교실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사진조차 본 적 없는 그 친구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교실 끝 왼쪽 끝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영어가 난잡하게 적힌 캡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모자 사이로 비치는 그녀의 얼굴은 삶은 달걀 속에 섞인 구운 계란처럼 거무튀튀한 색이었습니다. 얼굴색 때문인지 그녀의 분홍빛 입술이 유난히 돋보였죠. 그녀는 손을 입술에 대고 입술 껍질을 하나하나 벗기고 있었는데 그 손이 어찌나 불안했던지, 까닥하면 입술에서 피가 흐를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신지.          


저는 며칠 사이에 성화 여중의 스타로 등극했습니다. 쉬는 시간이면 항상 제 주변에 친구들이 모여들었죠. 서울에서 왔다는 이유였는데 특히 저의 말투를 신기해하는 듯했습니다. 내 앞에 와서 아무 말이나 해 달라고 조른 다음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응?”이라고 답할 때면 저들끼리 서울말을 잘 쓴다며 박수를 쳐대곤 했습니다. 반면 신지는 혀에 가시라도 돋은 듯 하루 내내 말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똑같은 머리에 똑같은 교복, 똑같은 공부를 하는 붕어빵들에게 처음 보는 마카롱은 배척이 대상이었기 때문이죠. 대개의 아이들이 긴 머리칼로 귀를 온전히 덮고 있었다면 신지는 스포츠 컷보다 길고 단발보다 짧은 머리로 두 귀를 훤히 내놓고 있었고, 대개의 아이들이 나풀거리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면 신지는 여느 사내아이들의 교복처럼 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다른 점이냐 꼬집을 수 있겠지마는, 그때의 붕어빵들 같은 아이들에겐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유였죠.          


아이들은 신지를 제 장난감인 냥 가만 내버려 두질 않았습니다. 모자를 벗기거나 뒤에서 의자를 빼는 등의 장난은 허다했고 사물함에서 신발을 꺼내 남자 화장실에 던져 놓고는 나 몰라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실에 우유가 배달된 적 있었습니다. 반장의 어머니께서 간식 삼아 빵과 함께 보내준 것인데 문제는 딸기 우유가 아니었다는 점. 흰 우유의 비릿한 맛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우리들은 대부분의 우유를 남겼고 우리 반의 행동대장 격인 민지는 주변 아이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잠시 후 그들은 자칭 ‘우유 분수대’를 만들어냈습니다. 우유팩을 옆으로 눕힌 다음 윗면에 구멍 서너 개를 뚫은 것이죠. 그들의 작전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민지가 ‘우유 분수대’를 들고 교실의 뒤편으로 향했을 때 신지는 뒷문을 열며 들어왔고, 그녀가 의자를 뒤로 빼며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민지는 의자 위에 ‘우유 분수대’를 재빠르게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신지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신지의 회색 교복 바지만 짙게 물들어 갈 뿐. 그 장면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방과 후 수업을 듣고 난 늦은 하굣길. 노을빛을 입은 청무 밭 앞으로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소녀는 앙상한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반바지 체육복을 입고 손에 바지 끝을 쥐어 잡은 채 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혹 긴 토시를 착용한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신지였습니다. 쨍한 노을이 예뻐서인지, 그 실루엣이 아름다워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한참을 주저하다 밭으로 내려갔습니다. 저를 발견한 신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괜찮냐고 해야 할지, 반갑다고 해야 할지 몰라 그냥 한 번 씩~ 웃는 것으로 끝냈는데, 신지도 별다른 말 없이 씩~하고 미소를 보내왔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노을을 앞 단무지 색 플라스틱 상자에 나란히 앉게 됐습니다.           


신지가 물었습니다. 

“왜 따라왔어?”

제가 답했습니다. 

“그냥”

제가 물었습니다. 

“넌 나보고 왜 웃었어?”

신지가 답했습니다. 

“그냥 네가 웃길래”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쌀쌀한 날씨 탓인지 살갗에 오돌토돌한 닭살이 돋아난 신지의 깡마른 다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가방을 열고 갖고 다니는 교복 바지를 신지에게 건넸죠.      


그렇게 잠시 후, 신지가 읊조렸습니다. 

“서로를 비스듬히 바라보고, 왼발을 약간 벌리고, 오른발에 체중을 싣고, 쓰리, 투, 쓰리”

제가 말했습니다. 

“뒤로 돌아, 원, 투, 쓰리, 자연스럽게 돌며 원, 투, 쓰리”     

체육 시간에 배운 왈츠를 신지랑 둘이서 얼마나 춰댔는지, 신지가 받치고 제가 허리를 꺾어 바라본 하늘엔 어느덧 해는 저물고 수없이 펼쳐진 별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퀴어문화축제? 뭘 반대까지 하고 그러세요. 다들 연인이랑 춤 한 번씩은 춰 보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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