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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욱근 Mar 23. 2020

혁기 씨의 삼각관계


 성긴 눈발이 희끗희끗 흩날리던 한 겨울날, 혁기 씨는 출근 중 편의점에 들러 '튀김우동' 큰 사발을 들이켠다. 짭조름한 간장 국물이 몸 안에 돌자 어제 먹은 이슬들이 조금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날씨 탓인지 유난히 속히 허한 그는 주머니 속 동전을 털어 삼각김밥 하나를 샀다. 눈덩이처럼 굳어 있는 밥을 데우려 전자레인지에 30초 돌리고 나니 김밥을 싸고 있던 김이 허물처럼 눅눅하게 변해 있다. 혁기 씨는, 밥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바삭한 김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보며 이 세상도, 세상 속 자신도 삼각김밥처럼 기구한 운명이 아닐까 생각했다.      


  “혁기. 수고했다. 광고 계약 따냈다.” 문을 열자 난데없는 박수 소리와 함께 한껏 상기된 허태욱 부장의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진다. 혁기 씨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어리둥절해하다 이내 그들의 기쁨에 동조한다. “아닙니다. 다 여러분들 덕분이죠.” 눈치를 보아하니 어제 미팅한 자동차 회사와 계약을 체결한 듯하다. 술자리에서 광고주에게 건넨 복분자주가 큰 역할을 한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다. 그때 허태욱 부장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혁기, 오늘 저녁에 뭐해? 광고주가 한 턱 쏜다고 종각으로 나오래.” 그가 말했다. “네, 되고 말고요.”     


 그때 녹다 만 커피믹스가 와그작, 이에 씹혔다. 그의 뇌리에 불길한 기운이 스친다. “다연 아빠, 오늘은 일찍 들어와야 돼.” 집을 나오며 들은 아내의 목소리가 머리에 떠올랐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지난 주말 딸아이가 자신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금요일에 내 생일인 거 알지?” 라 속삭인 일이 생각났다. 혁기 씨의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혁기 씨의 마음속에는 딸아이와 허태욱 부장이 양측 모퉁이에 서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펼치고 있었다. 그 둘 사이에서 누구에게 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어느 지점에 김혁기 씨 자신이 서있었다. 회식에 가자니 울상이 되어 있을 딸아이의 얼굴이 떠오르고, 집엘 가자니 혀끝을 차며 자신의 이름을 곱씹을 허부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혁기 씨는 이 상황이 패색이 짙어진 오목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이미 상대방의 말이 나란히 네 개가 이어져 있어 아무리 좋은 선택을 한다고 한들 패배를 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혁기 씨의 깊게 파인 미간 주름에서 그의 고심이 묻어져 나왔다.     


 혁기 씨는 1호선 종각행 지하철에 올랐다. 허부장님이 회사 정문 앞에 서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도리였다. 그 술자리는 연말 성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화기애애했다. 자동차 광고라는 꽤 수익이 큰 계약을 체결한 데다 광고주 또한 회사에서 제안한 콘셉트를 상당히 만족한지라 오고 가는 술잔에는 그들의 만족이 가득 담겨있었다. 두어 시간쯤 흘렀을까 허태욱 부장이 김혁기 씨의 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뭐냐?” 지하철을 타기 전 회식 자리가 끝나면 파는 곳이 없을 것 같아 미리 사둔 ‘꼬부기’ 인형이었다. 혁기 씨가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 아. 오늘이 딸 생일이라… 가방에 잘 넣었는데 커서 자꾸 빠져나오네요.” 허부장은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자기 아들 녀석의 생일에 치른 생고생을 늘어놓다 다시 잔을 들었다. “그럼 오늘은 이 잔을 마지막으로 일어날까요? 요즘 과음을 했더니 몸이 영 시원찮네.” 허태욱 부장이 김혁기 씨의 허벅지를 손끝으로 살짝 꼬집었다.      


 “서대문 대영빌라로 가주세요. 조금 빨리요.” 김혁기 씨는 곧장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아직 체인점 가게가 열려 있는 것을 보니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닌 듯했다. 아파트 입구에 내린 김혁기 씨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혹시나 딸아이가 벌써 잠에 들어버린 것은 아닌지 이미 토라져버린 것은 아닐지 김혁기 씨의 머리가 갖가지 상념들로 가득 찼다. 김혁기 씨는 빠르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무겁게 손잡이를 돌렸다. “아빠다! 엄마 아빠 왔어!” 딸아이가 버선발로 달려 나와 매미처럼 김혁기 씨의 품에 안겼다. 그가 “다연아 많이 안 기다렸어?”라고 묻자 딸아이는 “좀 기다렸는데 괜찮아. 나 아빠가 올 걸 알고 케이크도 아직 안 불었어!”라고 답했다. 김혁기 씨가 딸아이를 내려놓고 가방에 있던 인형을 꺼내 들자 아이는 자신이 마치 거북이가 된 냥 거실 바닥을 기어 다니며 기쁨을 표현했다. 마음 졸이며 달려온 김혁기 씨의 얼굴에서 옅은 미소가 번졌다. 케이크에 꽂힌 세 개의 촛불.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 같던 세 꼭짓점 사이의 간극. 해답은 모두가 한걸음 씩 다가오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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