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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욱근 Mar 23. 2020

아더의 마지막 장면

생각을 아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일 줄 알았더라면

밤은 산과 하늘의 경계를 무너트려 세상을 하나의 까만 덩어리로 만든다. 하루 내 꼽은 주삿바늘에 아더도 지칠 대로 지쳤나 보다. 집으로 돌아온 아더는 캣타워에 올라 까만 창문만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다. 그동안 아더를 키우며 한 번도 녀석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멍하니 어딘가 바라보고 있는데 당최 무얼 보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알 것 같다. 어둠 앞에 희미하게 비치는 네 실 루엣만으로도 알 것 같다. 생각을 아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일 줄 알았더라면, 평생 몰라도 됐을 텐데 말이다.


2주 전이었다. 1994년 이후 7월 기온이 최고점을 찍었다고 했다. 살이 익는다는 게 푹푹 찐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몸소 느끼는 요즘, 쟤도 더워서 그러는 거라 생각했다. 며칠째 그대로인 밥그릇을 보고 아더를 들어 세웠다. 왜 밥을 먹지 않냐고 다그치자 내 눈을 요리조리 피한다. 밥그릇 앞에 내려놓고 사료를 입에 갖다 대니 그제야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먹은 게 아니라 먹어 준거였나 보다. 다음날 아침, 세탁기 앞에는 아더가 게워 낸 토사물이 넓게 깔려 있었다.


의사가 내 인중을 보며 말했다. “복막염입니다.” 그리 치명적인 병명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다음 대사가 이상하다. “길어야 두 달입니다.” 의사는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이 아저씨가 더위를 먹었나 생각했다. 복막염에 시한부라니. 의사는 바이 러스니 백신이니 하는 어떤 말을 길게 늘어놓았는데 사실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얼른 아더를 데리고 나와 다른 병원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번째 의사도 똑같은 소리를 한다. 설사와 복통, 식욕 저하로 먹지 못해 죽는 결국 병이라고, 지금은 억지로라도 먹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의학 서적과 논문, 각종 사이트를 뒤졌다. 회복한 케이스는 없는지, 개발된 치료법은 없는지 한참을 찾았다. 그까지 꺼 먹이면 되는 거 아닌가, 사람 복막염도 고치는데, 마트에 들러 통조림을 한껏 챙겼다.


오늘 아침, 주사기로 입에 물을 넣어주고 있었다. 어느 순간 물도 입에 대지 않자 이렇게라도 먹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더가 경련을 일으켰다. 위로 아래로,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정체모를 액체가 흘러나왔다.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자지러지는 모습에 나는 손도 못 대고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의 태풍이 지나가고 다시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아더의 배가 산더미처럼 부풀어 올랐다. 톡 하면 터질 것 같은 아찔한 풍선 같았다. 의사는 복수가 찼다고 했다. 음식을 흡수하지 못해 그렇다고 한다.


“준우 씨, 준우 씨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의사가 내게 말했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고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제가 죽게 된다면 방에 커다란 의자 하나를 부탁할 것입니다. 의자에 앉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앉아서 죽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제 마지막 모습은 꼿꼿이 앉아 있는 것이면 좋겠습니다. 생사의 경계에 서서 고통스레 몸부림치는 모습 말고, 편안하게 앉아 눈 감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물론 속은 평화롭지 않겠지만 평화롭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불을 켰다. 창문 너머로 아더의 모습과 내 모습의 나란히 겹쳐 보인다. 얼마나 많은 생각이 왔다 갔다 했는지 모르겠다. 수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나는 아더를 보내주기로 했다. 최악의 모습을 사랑하는 이에게 보여주지 않을 선택, 어쩌면 아더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인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캣타워로 다가갔다. 녀석을 들어 안으니 평소 답답해 몸부림치던 녀석이 웬일인지 내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다. 아더의 까만 눈에 내가 비쳤다. 터질 듯이 죄어오는 가슴을 억누르고 아더의 귀에 입을 갖다 댔다. “사랑해 아더. 사랑해 아더.” 아더가 내 귀를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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