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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가족, 행복의 맛>과 가족에 대한 어떤 것

피와 성과 울타리

얼마 전, 영화를 보러 부천에 다녀왔다. 가는 길이 굉장히 멀었다. 내가 여기 사는 한 아마 다시는 안 갈지 싶다. 최근에 쓴 글들을 보면 덥다는 얘기가 한 번씩은 꼭 들어가 있어서 이번에는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날도 더웠다. 개더웠다 진짜. 


내가 본 영화는 한 편이었다. 원래 더 많은 영화를 볼 계획이었으나 세상의 모든 계획이 그렇듯이 계획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본 영화의 제목은 <불량가족, 행복의 맛>이라는 일본 영화였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일본 가조쿠(가족) 영화'였다. 조금은 예민하고, 약간 과장됐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소소하게 익숙한 문제로 누구는 지지고, 누구는 볶고, 누구는 튀기다가 마지막엔 모두들 '피식'하며 평화롭게 끝난다. 위의 포스터를 봤을 때 '대충 이런 느낌일랑가' 추측한 것과 비슷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꽤나 재밌었다. 뒷부분이 조금 늘어져서 지루하긴 했지만, <도리화가>에 비하면 더없이 훌륭했다. 이 시점에서 뜬금없이 <도리화가>가 나온 이유는 <도리화가>가 지극히 내 기준으로 최고의 똥영화기 때문이다. 주로 보고 난 영화에 대한 평을 하기에 애매모호할 때 머릿속에서 <도리화가>를 소환하는데, 거의 "에휴, 그래도 <도리화가>에 비하면 낫지"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불량가족, 행복의 맛>의 중심 소재는 장례식이면서, 너무나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한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은 가족들이 모이게 되는 아아주 강려크한 계기다. 인간의 도리로는 거부할 수 없는 자리다. 자손은 그에 대해 무엇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순 없다. 몇십 년 동안 집에 찾아오지 않았던 딸도 오고, 예비 히키코모리 손자, 흑화로 해탈한 고딩 손자도 온다. 심지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혼해서 서류 상으론 남이 된 며느리까지 장례식에 온다. 


사진이 상당히 공포스럽게 나왔는데 전혀 무서운 영화가 아니다. 


당연히 오랫동안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만나면서 갈등은 시작된다. 무엇보다 이 사람들이 사사건건 싸우는 이유는 '가족'으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친구 혹은 이웃사람 관계로 만났다면 아마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흙밭에 뒹굴면서 싸워도 다음날 그들은 여전히 가족이(으로 불린)다.


가족의 문제는 바로 이런 점이다. 벗어나려야 엔간해선 벗어나기 힘들다. 적당히 싫은 정도를 넘기고 웬수 수준이 돼야 겨우 안 보고 살 수 있게 된다. 최후의 내 편이 가족이라는 말이 있는데, 가장 큰 적은 우리 내부 안에 있다는 말도 있다. 틀어지면 아주 한 없이 골치 아픈 것이 가족 문제다. 


일본 단편소설집 <슈가 앤 스파이스>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제목이 다를 수도 있지만, 일본 소설은 맞다) 한 주인공은 주인공 이모의 동거남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 동거남은 행색이 추레해서 어쩐지 별로다. 주인공은 이모와 친했기에 동거남에 대해 묻는다. 왜 저런 사람이랑 사는지, 그리고 행복한지.


이모는 그 물음에 매우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전까진 자신이 항상 가족에 온전히 속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그래서 항상 '왜 평생 봐야 할 가족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 화가 났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하지만 이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사람과 잘 지내고 있고 그에 만족하니 가족 같은 건 상관없게 됐다'라고 덧붙인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는 것처럼, 가족도 다른 가족으로 잊혀졌다.  


정치적 사랑도 사랑일까,,? 제목 잘 지었다 핰핰 (출처: http://www.dreamwiz.com/VIEW/NEWS/AWFCc-5gQi9FNMj97oej)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싫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렇다 쳐도, 어렸을 땐 진짜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아무것도 못했다.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만한 그런 일들이 있었다. 누구랑 비교하면 덜 힘들었고, 누구랑 비교하면 더 힘든 평범한 그런 일들. 부모는 격정적으로 멀어졌고, 그것은 꽤나 오래도록 계속됐다. 


모든 싸움과 싸움이 만드는 여파는 (애새기였던) 내게 영향을 미쳤다. 짝꿍이 바뀔 때마다 짝궁의 글씨체를 따라 비슷하게 쓸 정도로 옆 사람의 영향을 많았던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집안의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나중엔 하기 싫었던) 나는 소리치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소리치지 못했다. 


뭐가 무서웠는지 설명하기 어려워서 추억을 하나 팔아본다. 그날따라 부모는 어쩐지 한층 더 격정적이었다. 나는 내 방문 앞에서 혼잣말로 계속 욕을 했다.(부끄럽지만, 나는 평생 욕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날 출근 준비를 하는 엄마한테 '이렇게 고통받으면서 왜 그만하지 않는지'에 대해 물었다. 엄마는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표현만 바꿔 비슷한 질문을 계속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엄마는 '무서워서'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대답이 너무 납득이 갔고, 공감했고, 약간의 화가 났다. 그래서 이후로는 어떤 격정적인 상황에서도 엄마에게 '헤어지라'는 둥의 말은 하지 않게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물리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집과 멀어지게 됐다. 멀어졌다고 해서 어떤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웃기게도 '진정한 대화'를 하려고만 하지 않으면, 갈등도 생기지 않는다. 싸움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를 안 보는 것이다, 최대한 오래. 그리고 가족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수 있는 의지와 힘도 함께 사라졌다. 피곤한 평화다.   


그래서 나를 소소하게 '피식'거리게 만든  이 영화의 결말이 마음에 들기도 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다. 영화에선 누군가가 가족 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거나 저절로 문제가 해결되고 모두 애틋해지지 않는다. 가족들이 모이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로 헤어진다. 그럼에도 '아무렴 어때, 가족인데~~ 하하'라는 느낌이 들어서 어쩐지 자격지심이 들어 부들대는 것이다. 


상당히 구질구질한 글이 됐다. 그래도 나는 이제 정말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귀찮아서 '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 선택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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