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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 대한 어떤 것(5/16)

꽃무늬 속에서 심심을 달래는 법

광주에 오자마자 잠이 늘었다. 날이 어둑해지고 캐드(캐나다 드라마도 이렇게 줄이나?) '김씨네 편의점'을 보다 잠들었다가 9시쯤 허리가 아파 일어났다. 대충 준비하고 숙소를 나섰다. 

유스퀘어로 가기 위해 매일 육교를 건너며 보는 풍경
띠용?
뭘 봐 X발



오전 11시쯤 도착했는데, 오늘은 할매가 깨어 있었다.(역시나 어제는 고의였나.........!) 깨어 있었지만, 침대에 누운 채였다. 


할매에게 왔다고 인사하고 나는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그리고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삼십여 분 정도가 지났을 때, 할매가 내게 "뭐 하냐"라고 물었다. 나는 책을 할매에게 보여주며 "책 읽지~"라고 대답했다. 할매는 고개를 끄덕이며 "으응"이라고 했다. 


겨우 3일이지만 나는 어쩐지 할매의 일상을 다 알 것만 같다. 할매는 주로 두 손을 배위에 올리고 움직일 수 있는 왼쪽 다리를 세운 자세로 누워 있는다. 할매는 밥 먹으러 갈 때 휠체어에 앉는 것을 제외하고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침대에서 누워 있는다. 물론 할매가 원한다면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산책을 나갈 순 있다. 단지 할매가 자주 나가고 싶지 않아한다(고 한다). 

할매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자세


할매의 방에는 TV가 있지만, 할매가 나서서 보는 것 같진 않다. 할매에겐 듣는 것도 보는 것도 힘든 일이 됐다. 할매에게서 2미터 혹은 3미터 떨어진 티비 화면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티비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뭐라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도 없다고도 한다. 할매의 시선이 티비 쪽으로 향해 있어도 나는 할매가 티비를 보는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다. 


이와 달리 할매가 아주 적극적으로 좋아하는 시간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이나 혹은 한 달에 몇 번 특별한 프로그램(요양원에서 주최하는 것인지 혹은 외부 단체가 방문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특히 댄스 프로그램 시간을 아주 좋아한다(내가 본 것은 아니고 일하는 분이 알려줬다). 


할매 방에 있는 테레비



그러니까 위의 대화에 이어서 할매가 내게 "심심해"라고 서너 번이나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위에 적은 것처럼 할매의 일상은 매우 단조롭고, 할매는 졸릴 수밖에 없다. 나는 할매가 요양원에서 지낸 몇 년 동안 잠을 잔 시간이 요양원에 들어오기 전 같은 기간에 잔 시간보다 두 배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할매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할매 나이 대의 노인이 하는 취미가 있는지 검색했다. 도움이 될만한 내용은 없었다. 나는 새삼 미안해졌다. 할매 옆에 있을 뿐, 생각해보니 나는 할매가 좋아할 만한 비슷한 것들도 떠올릴 수 없었다. 


문득 할매를 보러 오기 며칠 전 엄마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엄마는 이제 취미를 갖고 싶다고 했다. 엄마와 나는 수영, 골프, 자전거 타기, 그림, 외국어 같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할매가 건강할 때 할매에겐 무슨 취미가 있었지? 내가 기억하는 건, 할매가 테레비를 많이 봤다는 것이다. 


나는 염병하게 철없는 애새기였기 때문에 이제야 할매의 삶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됐다. 할매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자식이 매우 많았던 할매는 그만큼 오랫동안 자식을 키웠다. 하지만 가지 많은 할매의 나무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할매의 자식들이 자식을 낳을 때까지도 할매는 바빴다. 할매의 자식들 중 누군가는 매우 아팠고, 누군가는 사업에 실패했고, 누군가는 직장에 다니느라 자식(손주 손녀)을 돌 볼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할매는 얼마 없는 노후자금을 자식에게 줘야 했고, 60이 넘어서도 육아생활을 해야 했다. 할매는 제주도도 못 가봤다. 


요도, 이불도, 베개도 죄다 꽃무늬


요양원에 들어오면서 평화의 시간이 찾아오는 듯했지만, 풍과 치매도 함께 와버렸다. (할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할매는 이제 멍청해져부렀다. 말이 어눌해졌고, 질문을 듣고 이해해 대답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가끔은 10분 전에 일어난 일도 기억을 못 하게 됐다. 할매의 소화를 위해 직원이 할매를 휠체어에 태워 창가로 갔는데, 마침 그동안 나는 물을 마시러 가서 자리에 없었다. 창가에 있는 할매를 보고 할매 옆에 앉았는데, 할매는 "내가 어떻게 여그로 왔으까"라고 내게 물었다. 30분이 지나도록 할매는 침대에 누워 있던 자신을 누가, 언제 옮겼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오랜만에 할매를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참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다 보니 할매는 옛날을 잘 떠올리지 못해서 우리는 아주 짧고 단편적인 대화만을 할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나는 할매 옆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동안 할매는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인다. 


그래서 나는 요 며칠 '내가 매일 찾아오는 것이, 별 다른 재밋거리도 되지 않는 내가 할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하며 풀 죽어 있었다. 그런데 아까 오후 세시쯤 할매에게 "할매, 나 갈게. 내일 또 오께"하니 뜻밖에도 할매는 "가지 마. 더 놀다 가"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캬캬' 웃었다. 물론 할매 옆에서 더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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