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는 배가 아프다고 했다. 기분이 안 좋다고 했다. 움직일 수 없는 할매의 왼손이 배 위에 올려져 있었다. 살짝 그 밑으로 내 손을 넣어서 할매의 배를 만졌다. 뜨거울 정도로 따뜻해서 놀랐다. 겨우 옷 한 장(혹은 두장) 차이인데 할머니의 배는 마른 목들(목, 손목, 발목)과 종아리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피부와 장기, 뼈와의 사이가 가까워져서 그 안의 위의 온도가 전해지는 것일까? 할매의 목과 쇄골이 이어지는 부분, 정맥인지 동맥인지 여하튼 굵은 혈관에 피가 흐를 때마다 위의 피부는 심장박동에 맞춰 아주 빠르게 헐떡거린다. 나는 가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게 될 때가 있다.
4일 뒤면 나는 이곳을 떠난다. 열흘을 조금 넘게 지내고 있는 이 숙소, 처음에 아무것도 없었던 이 숙소는 꽤나 어질러진 상태가 됐다. 핑크색 소파에 옷과 책과 잡동사니가 올려져 있고, 옷걸이엔 옷이 걸린 옷걸이와 옷이 걸리지 않은 옷걸이들, 빤 양말들이 널어져 있다. 옷장 문은 항상 열려 있고, 욕실엔 내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다. 그리고 내가 지내는 오피스텔 건물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엘리베이터가 4대나 있을 필요가 있었다)
이 곳에 익숙해졌다는 것은, 내가 떠나야 할 날도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어쩐지 조바심이 난다. 할매를 못 본다는 조바심이 아니라,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 지금과는 또 조금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일교차가 큰 요즘의 낮과 밤만큼이나 다를 것이다. 그 생활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자꾸만 조바심이 난다. 쫄보는 역시나 어쩔 수 없다.
할매를 보러 간 첫날에는 거의 책만 읽었는데, 이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합리적 선택을 할 때는 항상 기회비용을 생각하라고 한다. 할매를 보러 온 것이 선택이었다면, 그에 대한 기회비용은 휴식과 조금 더 빠른 구직준비였고, 이 때에 내가 선택을 할 수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행복(여러 감정이지만 굳이 말하자면)은 기회비용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작 열흘만에 행복해졌고, 다른 선택지에 대한 생각을 할 차례가 온 것이다.
온 것일까? 나는 정말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나? 충분하다라고 할 수 있나? 결국 나는 나 편하자고 온 것이 이었고, 이게 정말 사실이 맞는 것 같다. 할매가 점심을 먹으러 갈 때 나도 요양원을 나섰다. 할매는 "조심히 가거라"라고 말했다. 내가 '바빠서 못 오고 있는' 할매의 자식들과 뭐가 다르단 말이지? 사실 다르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