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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음에 관한 어떤 것  

좋다하지만 조금씩 다른 

내 방에 에어컨이 없다. 창문을 열어놔도 시원해지지 않는다. 특히 폭염이 시작되고 난 이후 수면의 질이 그야말로 바닥이다. 그래서 지인의 집으로 피서를 온 상태다. 에어컨이 있는 원룸인데, 잠들기 전부터 해가 뜰 때까지 계속해서 뽀송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어제저녁엔 각자 알아서 밖에서 놀았고, 새벽 세시쯤 집 앞에서 만나 함께 집에 돌아왔다. 들어오기 전에 우편함에 들렀는데, 여러 우편물 중엔 외국에서 사는 지인의 지인이 지인에게 쓴 손편지도 있었다. 누구나 라인, 카카오톡, 왓츠앱, 스카이프, 위챗 어쩌구 저쩌구 메신저들을 쓰고 있는 와중에 우표가 붙은 하얀 편지봉투를 본 게 오랜만이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내게도 언젠가 하루 걸러 하루 편지를 쓰던 날들이 있었다. 당시 나는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컴퓨터도, 휴대폰도 없었다. 전화카드를 자주 사기엔 가진 돈이 별로 없었다. 또한, 거의 모든 일을 노트북으로 하는 요즘과 달리 저 때엔 거진 모든 글을 손으로 썼다. 아, 어쩌면 가장 중요했던 한 가지, 현지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 '대화'를 할 일이 별로 없었다.(사실 난 그전까지 내가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와장창) 


옛부터 유배지에 갔던지 혹은 어떤 이유로든 외로워진 사람들이 편지를 많이 쓰지 않았던가? 물론 난 정약용도 고흐도 아니지만, 위 모든 상황은 내가 편지를 쓰는 데 상당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쉬거나 딴짓을 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한국의 친구들에게 (굳이) 편지를 썼다. 


나의 편지지는 A4용지였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A4용지. 노트를 찢어 쓰는 것보다는 A4용지가 낫다고 생각했다. A4용지에 줄을 따로 친 것도 아니고, 문단의 나누지도 않고 줄글로 계속 이어서 썼다. 그렇게 쓰다 보면 한 장을 채우는데 1시간 정도가 걸린다. 거기에 외국에서 가는 편진데 어쩐지 한 장만 쓰면 야박해 보이니까 보통 한 통에 두 장을 썼다. 정말로 하루 걸러 하루 쓰다시피 썼고, 기간으로 따지면 2년~2년 반 정도 계속했다. 


이 시기에 부친 모든 편지를 쓸 때마다 즐거웠다. 분명 우울함으로 가득한 내용도 있었겠지만, 그때에도 편지를 쓸 땐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뭐라도 쓰면 무언가가 나아진다. 안 나아질 수도 있지만, 나아지기도 한다. 다이어리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편지를 쓰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한다. 예상치 못한 것이라면 더욱더 좋아한다. 나보다 몇 주 앞서 퇴사한 전 직장동료로부터 엽서를 받았다. 그의 마지막 출근일이었고, 하루 종일은 아니었지만 비가 오는 날이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누군가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이지만, 헤어짐의 기념으로 받은 엽서라 어쩐지 마냥 기쁘다고 하기엔 조금 마음이 아팠다. 물론 읽고 나선 따뜻한 마음이 됐다. 더할 나위 없이 소소하게 좋은 내용이었다. 편지 IS THE WARMEST WRITING.


그렇지만 최근의 나는 편지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5년 정도 된 것 같다. 쓰고 싶긴 한데 어쩐지 쓰는 것이 내키지가 않는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받는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다. 받는 사람에게 도착해야 편지의 기본이 완성되는 것인데, 주고 싶지 않으니 쓰고 싶어 지지도 않는 것이다. 


나는 편지를 엄청 열심히 쓰는(썼던) 편이다. 누가 '넌 정말 열심히 편지를 쓰는구나!'라고 평가해준 적은 없지만. 그러니까 내가 편지를 쓰고 싶지 않은 이유는 열심히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편지를 대신할 노트북과 핸드폰을 샀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무지하게 게으르지만, 그것 역시 온전한 이유가 아니다. 손 편지가 아니라 타자로 쳐서 인쇄한 편지도 쓸 자신이 없다. 


그것은 내가 나와 내 편지를 받을 '누군가',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 공유하고 싶은 소재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피곤한 일이다. 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의 생각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도 피곤한데 무려 상대방에 대한 나의 마음을 생각하고, 심지어 그것을 문자로까지 표현해야 하다니. 편지는 웃기게도 내가 쓴 것인데 내 손을 떠나면 영원히 상대방의 소유가 된다. 이것은 꽤나 무서운 사실이다. 내가 쓴 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의 집을 모조리 알아내서 몰래 그 집에 들어가 그것들을 빼온 뒤 캠프파이어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사소한 몇 가지의 법은 어겨도 된다는 생각이 들만큼 무서운 사실이다. 


겨우 편지 하나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은데, 맞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그나마 내가 당당하게 어쩔 수 없어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다. 


5년 동안 몇 번씩 편지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만 나는 그 부탁을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쓰지 않은 것은 아닌데, 겨우겨우 편지지를 채웠다가도 마지막에 가선 어쩐지 전해줄 수가 없었다. '전해줄 마음이 없던 편지' 몇 통은 아직도 내 서랍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나는 가끔 그것들을 꺼내 읽는다. 진득하게 읽을 수가 없어서 항상 휘리릭 훑어 내려가 버린다. 


이렇듯 편지는 무서운 것이지만, 나는 여전히 편지를 좋아한다. 쓰는 것도 받는 것도 좋아한다고 말한다. 물론 내가 쓰지 않으므로, 써달라고 하지 않는다. 기대 안 하는 척하면서 써주길 기대하지도 않는다. 공자가 그랬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고(己所不欲, 勿施於人), 공자의 공은 사실 공정할 공 자다.  




이번 글을 쓰면서도 역시나 클라우드를 뒤적거렸다. 추억의 판도라 상자를 연 것은 잘못이었지만, 당장에 쓸만한 사진이 없었다. 부제목에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들은 내가 꾸준히 좋아하는 것들이다. 내가 좋아한다는 것 말고는 세 사진의 개연성은 전혀 없다. 






언젠가 놀러 갔던 지방의 한 축제에서 봤던 불꽃놀이. 위 사진의 불꽃이 터지고 꼬리들이 없어진 틈을 타 재빨리 찍었더니 아래와 같은 사진이 나왔다. 핸드폰으로 찍은 것이고, 조명 때문에 예쁜 나무들이 후줄근해 보이고, 초점은 어디로 날려먹었는지 모르겠는데, 슬쩍 보면 엄청 밝은 별이 떠 있는 것 같아서 좋아한다. 참고로, 당시 함께 했던 사람과의 마지막은 불꽃놀이처럼 터져버렸다. 


그리고 인정하지 힘들지만 맞는 것 같은 것이 있는데, 내가 편지 쓰기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이전에 이미 미친 듯이 열심히 편지를 썼던 적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와, 진짜 구린 문장) 위에 말한 그 시기에 썼던 대부분의 편지는 한 사람에게 갔다. 그리고 이제껏 누군가에게든, 어떤 내용이든 편지를 써야 할 땐, 어김없이 저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 때문ㅇ디ㅏ.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기억이 있으므로 나도 모르는 새 비교가 되고, 결과적으로 '그때만큼 쓰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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