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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다.
세차게 바람이랑 같이 왔다. 조금 더 거리를 걸으며 이곳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그만두어야 할 정도였다. 가방에서 우산을 꺼낼까 고민했다. 여기가 서울이었음 몸과 옷이 매우 소중하다는 듯 서둘러 우산을 꺼내 내리는 눈을 막았을 터. 그러나 아무도 우산을 펼치지 않았다.
옷에 딸린 모자를 한 번에 휙 쓰고는 각자의 길을 걷는 헬싱키 사람들이었다. 눈을 뜨기 힘든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있는 그대로 위기를 받아들이는 무덤덤함이 보였던 건 아마 그들의 변함없는 표정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냥 맡으며 걸었다. 모자가 축축해져도, 눈을 맞은 옷이 하얗게 덮여도. 그런 상태로 덤덤히 집으로 향했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생김새는 익숙하지만 만남은 처음이다. 각진 마름모 창살들이 괜히 살벌하게 느껴진다. 조심스레 열어 캐리어를 넣고, 나를 넣고 손을 놓는 순간, 쾅! 소리를 내며 닫힌다. 괜히 타서 망가지는 건 아닌지, 갇히는 건 아닌지 하지만 그런 두려움도 정보 가득한 유튜브 세상에서는 작아진다. '유럽 엘리베이터 타는 법'. 아무리 눌러도 올라가지 않던 엘리베이터가 미닫이 문, 창살문 모두 닫으니 올라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자동으로 척척 움직이는 게 신기했다. 꼭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나이 지긋한 장인 같달까.
'주소가 여기가 맞는 거 같은데...?'
이상하다.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알려준 현관문이랑 다르다. 건물 입구에서부터 갈라진 갈림길에서 왼쪽이 아닌 오른쪽으로 틀었어야 했다. 괜히 다른 집 문을 열 뻔했다. 그랬다면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졌을까? 다시 내려가서 오른쪽 동으로 이동해 진짜 집으로 들어갔다.
넓은 더블 사이즈의 침대, 은은한 조명, 작고 소박한 부엌, 건물 뷰의 창. 타지에서 숙박을 고를 때 항상 따졌던 건 바로 뷰였다. 그러나 동경하던 나라라면 다른 이야기. 이런들 저런들 그냥 있는 것만으로 행복을 주는 나라에서는 탁 막히는 건물이 앞에 있어도 그래서 커튼을 활짝 열지 못해도 좋았다.
잘 지내보자. 헬싱키의 집에서 인사를 나누고 잠시 목을 축인 뒤,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워 어두컴컴한 거리로 나갈 준비를 했다. 갈까 말까 고민하던 그곳으로.
알바알토가 건축한 서점, 아카데미넨 서점이다. 인생 영화 <카모메 식당>의 촬영지. 어두워서 밑으로 내린 창문이 및을 발하진 못하지만, 온통 외국어의 책들이 가득 하지만, 이곳 사람들의 퇴근 시간에 서점에서 구경을 하고 있으니 괜히 핀인이 된 것만 같다.
간결하고 미니멀한, 자연물들이 대부분인 디자인들을 구경했다. 한 10년 전 친구들과 디자인 관련 책들을 보며 기억에 남아있던 그 디자인들이 여기 아직 있었다. 참 오래가는 게 매력인 것 같다. 그들 속에서 마음을 사로잡은 엽서 하나가 있었다. 푸르스름한 배경에 커다란 보름달이 떠있고, 눈 쌓인 다리와 바위 위에 무민과 친구가 있는 엽서였다. 차가운 파란색인데 노랗게 핀 달 때문인지 따뜻해 보였다. 그렇게 보고는 발걸음을 돌렸었다. 여행을 오면 꼭 하는 일 중에 하나가 그 여행을 나타내는 엽서 모으기였다. 아직 1일 차고, 사기에는 이른 것 같아 뒤를 돌았지만, 그냥 가기에 너무 아쉬움이 밀려왔다.
어느새 계산대 앞. 안경을 쓴 푸근한 아주머니가 내 계산을 담당하셨다. "Hello" 방금 행복한 일이 있었던 사람의 미소였다. 그 이후로 따발총 같은 영어가 이어졌다. 추측으로 알아맞히건대 '토요일, 내일 다시 와.'라는 내용이었다. 그 이유는 못 알아들었지만, 오케이 웃으며 대답하고 헤어졌다. 엽서가 사고 싶었던 이유가 이거였다는 생각을 했다. 푸근한 아주머니의 살가운 인사를 받고 영어로 대화를 해보라는 그런 까닭에.
다시 집 가는 트램을 기다린다. 조금 주춤해진 눈에 거리에는 어떤 예술가가 귀여운 눈사람을 만들어놓았다. 첫날 오후가 동화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