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은 현실
한국에서부터 경력을 따지면 간호사로 일한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미국에 와서야 그야말로 ‘찐’ 약쟁이를 처음 만났다.
미국에서는 병동으로 입원시킬 때 시스템상 입원할 병실이 정해지면 전화로 인계를 한다. 담당 간호사를 찾아서 평소 인계하듯이 필요한 내용을 전달하고 궁금한 내용에 대해서도 답을 해준 뒤, 이후에는 EMS(이송전문구급대?)를 통해 환자가 오게 되는 구조이다. 유일하게 인계가 없는 상태로 환자를 밀고(?) 들어오는 경우가 딱 한 가지인데 그건 우리 병원 응급실에서 입원이 이루어진 경우이다.
우리 병원은 이 지역에서 상급종합병원으로 트라우마레벨 1 병원인데, 가장 심각한 상태의 환자를 받는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우리 병원은 응급실은 널찍하고 한가로운 보통의 미국답지 않게 인파가 넘치다 못해 시장바닥처럼 복잡하고 정신없으며, 항상 미친 듯 바쁘기로 유명해서 병동에 보내며 인계를 주지 않는다. 그나마도 차팅도 못할 지경이었던 환경이었던 것을 최소한의 차팅은 하자고 의견을 모으고 시스템을 바꾸게 되어서 이제는 여러 기록들을 모아 환자파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조각조각 남겨진 노트들을 빠르게 훑어가며 중요한 정보들을 모아서 입원 시 참고하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예상치 못한 상황은 맞닥뜨리게 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게 응급실에서 병동으로 입원한 환자 는 다리가 썩어가는 채로 통증을 견디지 못해 왔다고 했다. 상처만 빼면 별거 아닌 환자인데 입원을 시킨다니 도대체 무슨 문제가 또 있는 걸까? 보통은 상처 치료 후 퇴원하고 입원까지는 안 하는데 심각한 다른 질환이 있는 건가 하며 의아하게 기록을 찬찬히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IV drug user. 친히 주사기로 자기 혈관을 찾아 마약투약을 하는 찐 약쟁이가 내 담당이 되다니! 이렇듯 미국병원은 참 엄청난 곳이다. 그나마 내과병동이라서 총상환자는 자주 안 보니 다행이랄까.
솔직히 좀 무서웠다. 왜냐하면 마약 하는 사람들은 영화에서 어둠의 세력으로만 봤고 실제로 만나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리나라도 이젠 마약청정국이 아니라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정도도 아니니까. 그런데다 함께 온 보호자가 여자친구라는데 얼굴을 보니 영화에서 보던 ‘찐 마약쟁이’의 얼굴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눈밑이 시커멓고 눈동자에 초점도 없는 멍한 표정. 이게 마약중독자의 진짜 현실인가?
온몸에 혈관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찔러서 마약을 했다던 환자는 마지막으로 약을 한 게 언제인지 물으니 어제. 헤로인을 했고 코카인도 한다고 했다. 흐.. 이게 찐 마약중독자로구나. 이런 환자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경험이 없어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 사람도 결국 도움이 필요해서 온 환자니까 겁먹거나 특별히 대하기보다 그냥 보통의 다른 환자처럼 대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다리는 왜 그리되었나 물으니 닥치는 대로 주사를 찔러 마약을 하다가 팔에는 더 이상 마땅한 자리가 없자 다리의 혈관에도 바늘을 찔러 마약을 했는데 아마도 감염이 생겼던 모양이다. 병원에 오고 싶지 않아서 -아마도 비용 때문이겠지- 한 달 정도를 여자친구에게 숨기다가 점점 더 아파지고 또 썩어가는 부위의 냄새가 심해져서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응급실에 제 발로 왔다는 것. 그러나 보통 보호자로 오는 사람들과 달리 이 여자 친구도 이미 중독자의 모습 그대로여서 이거 환자 두 명을 같이 보는 기분이었다. 정말 총체적 난국이다.
보통 처음 상처를 확인한 응급실 담당 간호사가 기본적인 드레싱은 해주고 병동으로 보내야 하는데 어쩌면 그 바쁘고 급박한 응급실에선 약쟁이한테까지 노력해 줄 자비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상처가 내 얼굴만 하던데 그대로 드러난 채로 침대에 웅크리고 실려 들어온 모양이 참, 난감했다. 그래도 어쨌든 내가 담당한 환자이니 간단히 드레싱을 해주고 성형외과에서 레지던트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전쟁통 같은 응급실에서 꼬박 하루를 지내다가 오니 환자는 조용한 1인실에 들어오니 그때부터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이트담당 레지던트가 환자를 만나러 들어갔을 때만 잠깐 일어나서 이야기를 나누고는 처방이 나올 때까지는 어차피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일단 잠이라도 좀 자도록 내버려 두었다. 취침약 돌리는 시간이기도 해서 어차피 나도 다른 환자들 때문에 바빴으니 우선순위에서도 밀리긴 했다.
마지막으로 입원환자를 확인하러 가서 입원정보를 마저 조사하며 필요한 것이 있는지 확인하니 한동안 잠잠했던 통증이 다시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의사가 기본처방으로 지정해 놓은 마약성 진통제가 있었지만 ‘진짜 마약’을 매일 하는 환자에겐 그건 아무 효과가 없었다. 환자마저도 하이드로몰폰과 모르핀은 자기한텐 타이레놀 같은 거라고 하니 말해 모해. 아무튼 줄 수 있는 진통제를 다 주고도 환자의 통증정도는 나아지지 않자 참지 못한 환자는 다른 진통제를 받기 위해 의사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이트 근무 중인 레지던트에게 연락을 해서 환자와 의논을 했으나 결국 의미 없는 진통제였는지 4시부터 환자는 집에 가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AMA라고 줄여 부르는데 Against Medical Adivice, 즉 의료적인 권고에 반해 스스로 치료거부와 퇴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의료인은 환자의 건강적인 이익과 손해를 판단해서 병원에 남아 추가적인 검사 및 치료가 필요하다고 결정했지만 환자 역시 자율의사가 있기에 그 의견이 다른 경우 서류를 작성하고 합법적으로 치료를 중단하고 환자가 원하는 퇴원을 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사가 하는 조언과 지시에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고, 만일 서로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극히 드물게 자신의 의료적인 조언에 반하는 의사를 표현하는 편이다. 그러나 미국은 정말 다양하고 기준을 정할 수 없을 만큼 여러 가지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모인 나라여서인지 심심치 않게 AMA를 실행하게 된다.
처음에 퇴원하고 싶다고 했을 때에는 의사와 이야기를 한 후 진통제를 다른 것으로 바꿔보자고 결정해서 번복을 했는데, 의사들의 인계시간인 6시가 되자 또 같은 말을 했다. 다시 레지던트에게 연락을 하니 지금 인계 중이라 끝나고 데이근무팀 의사가 갈 것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아침시간은 여러 일로 바쁘고 불행히도 환자가 너무 애매한 시간에 요구를 하는 바람에 의사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갔다. 그러나 아무 치료도 하지 않겠다고 한 환자가 어떤 의료진에게 우선순위가 되겠는가? 결국 그 환자는 내가 인계를 주고받는 7시가 넘어서까지 아무 치료도 받지 못하고 의사도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다가 마침 도착한 의사에게 이야기를 다시 전달하고 환자를 인계했다. 그날 저녁 나는 다시 출근할 예정이었는데 결국 그 환자는 그 상처 그대로 약쟁이 여친과 사라진 뒤였고 다른 환자가 그 방에 입원해 있었다.
그 하룻밤동안 많은 감정이 오갔다. 마약을 하는 사람에 대한 나의 편견과 선입견, 왜 그런 삶을 살아야만 했는지에 대한 의문과 약간의 연민, 그럼에도 약을 포기하지 못하고 다시 거리로 나가기를 선택한 어리석음에 대한 한심함 등등 그저 여러 환자 중 하나인 그 청년을 통해 참 많은 생각과 고민이 있던 밤이었다.
태어나 마약의 ‘ㅁ’자도 모르고 본적도 없이 살아온 나 자신이 참으로 안전하게 살아왔다는 생각과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약에 중독된다는 것을 여러 매체를 통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만일 내 선택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마약이라면 절대로 내 인생을 살아있지만 죽은 것처럼 만드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 또한 하게 만든 밤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며 직간적접으로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끼고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삶 속에서 성장한다. 내가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나이가 먹어갈수록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저 이미 태어난 인생이라 어찌저찌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이왕 시작하는 거라면 후회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해보는 삶이 좋겠다. 물론 좋은 의미로 말이다.
간호사로 일하는 것 중에 많은 부분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만큼 간접적인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많고 내가 미래의 현명한 선택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때로는 그냥 안 보고 싶고 관심 갖고 싶지 않은 인생도 있어서 괴로울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기에 결국 내 돈 벌러 다니면서 오히려 배우는 것이 많다.
매일 개성 있는 환자들을 통해 영화 같은 현실을 관람하는 관객으로서 그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찾아보고 혹시나 내가 어떤 이의 삶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때가 온다면 기꺼이 나의 경험과 교훈을 나눌 수 있는 간호사가 되면 좋겠다는 결론으로 오늘의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