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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때문이야!

평화로움 뒤에 보이는 외로움

by 미국간호사 Sophia

내과병동이라 그럴 테지만 참으로 간에 문제가 생긴 환자들이 많은 계절이다. 겨울엔 감기, 독감, 코로나 등등의 호흡기 질환이 유행하더니 날씨가 좋아지자 간부전으로 황달이 오거나 간성혼수 등의 문제로 입원하는 환자가 부쩍 늘었다. 오늘 내가 맡은 환자도 다섯 중에 세 명이 간 때문이다.


일부는 지방간 등의 지병이 악화되거나 담낭(쓸개)이 막히거나 담석등이 생겨서 간에도 영향을 주는 경우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은 알콜성간손상이 원인이다. 다른 말로, 술이 원수다. 술 많이 마셔서 간이 망가지고 이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인 것이다. 미시간은 겨울이 길고 추워서 여름이 오면 본격적으로 야외활동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만큼 술 마시는 기회도 많다는 우스갯소리가 진짜인가 보다.


처음엔 좀 이해가 안 됐다. 아무리 봐도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일상이 여유롭고 스트레스도 덜 받고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회식을 가서 폭음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소셜드링킹이라고 이야기하며 한두 잔씩 마시는 것만 봤는데 왜 그렇게 간이 다들 망가졌을까...


일 년이 넘게 병동에서 일하며 많은 환자들을 보면서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 생각보다 미국 사람들이 그리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치열한 경쟁과 생존에 이미 익숙한 DNA를 가진 것 같다. 웬만한 일에는 잘 적응하고 이겨내려는 각오가 기본값으로 갖춰졌다는 느낌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쿠쿠다스 멘탈이니 너무 곱게 자랐니 말도 하지만, 그건 옛날에도 어른들이 우리 세대를 보며 늘상 하던 말이었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세대의 자녀들이니 빡빡하게 키울 필요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니까. 그럼에도 자기 인생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젊은 친구들이 정말 많은 곳이 우리나라이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나 역시 기성세대에 속할 만큼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내 기준에 비해 나약해 보이는 어린 친구들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저렇게 나약해서 어찌 사누 싶었다. 알게 모르게 나도 그런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 노력하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을 와보니 사람들의 경제사정과 집안가풍, 주변환경의 스펙트럼이 정말 크다. 우리나라 강남 8 학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숨 막히게 경쟁하고 엄격하게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도 있고, 캔음식만 먹이더라도 매일 굶지 않는 게 어디냐 하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세계 최강대국이라 불리는 미국도 문맹률이 높다는 점이었다. 글을 읽을 줄 모르기에 새로운 것을 접할 때 주의사항이나 중요한 내용들도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알 수 없고 그런 사람의 주변인들 역시 비슷한 게 현실이다. 의외로 까막눈이 많고 그만큼 분별력도 떨어진다. 땅이 넓은 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기에 대체적으론 우리가 보기에 선진국으로 인식되지만 실제론 그렇지 못한 부분들이 있는 것이다. 그만큼 여러 가지 이유로 의외로 스트레스받고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사람들도 술을 마셔대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이끌어 나갈 만큼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도 술에 의지하니 알콜의존성 간손상을 가진 환자들이 참으로 많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마약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마약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풀어보겠다.


지난주부터 담당하고 있는 환자 중 한 분은 매우 유쾌하고 자학개그를 많이 하는 재밌는 사람이다. 솔직하고 웃기는 면도 많아서 매번 만날 때마다 서로 웃으며 약도 주고 화장실도 데려가곤 한다. 진단명은 소화기계 출혈이었지만 그것 이외에 간경화와 복수도 큰 문제로 남아있다. 거의 죽다 살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상황을 겪었지만 붓기가 남아있는 자신의 발을 소세지라고 말하고 복수가 차서 있는 대로 불러있는 배를 보고 아기가 언제 나올지 모르겠다고 한다. 지금까지 이렇게 재밌는 환자는 처음 봤을 정도다.


하지만 처음 이 환자를 맡았을 때, 아내와 아이들은 밝지 않았다. 중환자실에서 이제 막 일반병동으로 왔기 때문에 더 심각했던 걸까? 친절하고 예의 바른 아내였지만 약간의 집요함과 까칠함이 보이는 사람이었다. 아이들도 아직 어려보였는데 아빠와 그리 유대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미국에선 가족을 절대 우선시하는 게 대부분인데, 이 가족에게도 무슨 사연이 있겠구나 싶었다.


젊은 시절 조종사를 했다던 이력 때문인지 환자는 하루가 다르게 회복을 했다. 첫날엔 침대에서 양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도 힘겨워했는데, 다음 날엔 침상 옆에 변기에서 볼일을 볼 수 있을 만큼 기력이 생겼고, 오늘은 워커를 밀며 화장실을 천천히 다녀올 수 있는 상태였다.


미시간주에서는 간이식을 받으려면 6개월 이내에 음주를 한 이력이 없어야 대기자명단에 올라갈 수 있다고 들었다. 아직 술을 끊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아직은 복수를 주기적으로 빼면서 간이식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평가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여전히 쌍둥이를 가진 것 같이 부푼 배를 언제까지 봐야 할지 모르겠다.


매일 환자와 간호사로 서로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친근하게 이야기를 하며 만나고 있지만, 어쩌다 그리 된 건지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당사자가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면 공적이든 사적이든 개인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문제는 절대 먼저 질문을 하지 않는 편이고 이미 주변의 분위기나 대화의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이 집안에도 어두운 부분이 분명 있었다.


우연일 수도 있으나 누군가에겐 장점이고 대단한 일을 했다고 보여지는 부분이 당사자에게는 부담과 압력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는 어렴풋한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하며 알려야 하고 어제의 나와 경쟁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는 좀 다른 부분이지만 행복해 보이는 것과 정말 행복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분에서 나오는 게 아닌 것 같다.


미국에 와서 살면서 가장 많이 변한 내 모습 중 하나도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에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다른 남과 내 인생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인데도 우리는 그게 맞다고 인식하며 살아왔기에 쉽사리 고치기가 어려웠다. 대체로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 생각했던 나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에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미국에 와서는 달라진 비교대상에 조금은 자유롭다는 생각을 했지만, 요즘 만나는 환자들을 보면서 그런 비교도 나의 발전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수는 아니겠다고 느꼈다. 내가 내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너그럽게 품어주지 못한다면 남들이 아무리 칭찬하고 인정해 주더라도 행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한 번 태어나도 또 한 번 죽는다. 그 사이의 시간은 결코 남을 위해서 살아서도 안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 분명한 사실을 우리는 대부분 잊고 산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쓸데없는 알콜에 내 간을 내어주지 않기 위해, 이제는 시간을 쓸 때가 왔다.


이렇게 나를 위해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유쾌하지만 아픈 이면이 있는 D에게 하나라도 더 뭔가 해주고 퇴근하려고 콜벨에 답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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