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 보이겠지만 큰일 날 소리!
한국에서 워낙 헉소리 날만큼 많은 수의 환자들을 담당했기에 미국 오면 아무리 환자가 많아도 할만할 줄로 알았다. 4-5명 맡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적은 환자를
간호할 수 있지? 우리나라는 아무리 적게 보는 병동도 최소한 15명 이상인데.. 가면 할 일 없는 거 아냐? 하는 가소로운 소리를 했더랬지.
처음 오리엔테이션 시작하며 데이근무에 4명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4명도 벅차다는 걸!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밥도 겨우 먹고 퇴근 때면 만신창이가 된다는 걸!
나이트에는 보통 5명을 보는데 그나마 환자들이 크게 아프지 않고(병원에서 아프지 않다니 말도 안되는 상황이라는 말) 그날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이 잘 따라주면 덜 힘들고, 그도 아니면 정신이 온전치 않거나 아파서 병원에 왔으면서 혈압도 재기 싫다, 약도 먹기 싫다를 시전 하기 시작하면 씨름하느라 끝이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아픈 몸을 간호사에게 맡긴 거대한 환자가 더 사랑스럽다.
한국병원들과 달리 지금 내가 일하는 병원은 나이트 근무에도 입원이 항상 있다. 처음 미국 와서 깜짝 놀란 것 중 하나이기도 한데 이렇게 바지런히 병상회전을 시키다니 역시 자본주의 나라답다. 미국이 어떤 나란데 일이 쉬울 거라 생각했나.
첨에는 충격받고 가장 싫은 일이 한밤중에 입원받기였는데 좋으나 싫으나 자꾸 하다 보니 이젠 많이 자연스러워졌다. 새벽 세시든 네시든 입원하는 환자들에게 약도 주고 입원질문도 하고 헤드투토어세스(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반적인 환자상태를 전체적으로 확인하는 과정)도 하고 그러다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환자랑 하게 되니 친해지기도 해서 몇 시간 데리고 있지 않았는데 퇴근할 때는 환자가 나에게 오늘 다시 저녁에 출근하느냐며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간호사로서 나를 찾아주고 고마워하는 환자는 보람을 주지만 그만큼 내가 할 일은 많아진다. 어떨 땐 내 직업은 원래 그런 거라며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항상 그러지는 못하는 게 사실이다. 아무래도 나의 신체적&정신적인 건강이 기본이 되어야 그런 마음이 우러나는 게 가능한 것 같긴 하다.
한국에서 일할 때는 너무 많은 환자를 감당하느라 시간에 쫓기며 일해서 체력적으로 많이 지쳤더라면 미국에서는 그보다 수는 적지만 각 환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세세히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한국 못지않게 힘들다고 느낀다. 특히, 이 나라에선 나는 초등학생보다도 못한 체구와 체력을 가졌기에 모두가 다 크고 무겁다. 혼자서는 도저히 할 자신도, 필요도 없다고 느끼며 계속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려면 나도 시간 내서 동료들을 도와줘야 한다. 멋들어지게 말해서 팀워크인데 결국 혼자서는 못한다는 말이다.
요즘은 가끔 나이트근무에도 4명을 맡는 때가 생겨서 할만하구나 하는 말이 나오지만, 최악의 경우도 겪는 날이 있어서 오늘 한 번 하소연해보려 한다.
특별한 일은 없는 시작이었다. 평일이라서 근무를 하겠다는 에이전시간호사가 없었던지 첫 4시간을 도와준다고 동료간호사가 와있어서 당연히 밤 11시부터는 누군가 오겠지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날 차지널스가 분주하더니 10시쯤 되었을 때 폭탄선언을 했다. 20명이 정원인 우리 병동에 밤 11시부터는 3명의 간호사가 근무를 하게 되었으니 환자를 더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남편에게 옮은 감기로 기침을 꽤 많이 했던 터라 그 외의 증상은 없었어도 그날 나에게 맡겨진 차지널스를 못하겠다고 했다. 같이 일하던 동료 S에게 대신 차지를 맡아줄 수 있는지 부탁을 했고, 이미 그녀의 부탁으로 여러 번 근무를 바꿔준 것 때문에 흔쾌히 차지를 맡겠다고 했다. 차지널스는 아무래도 일반 간호사보다는 할 일이 많은 상태라서 3명이 환자를 맡게 되면 당연히 부담을 줄여줘야 하기에 나와 다른 동료 T가 각 7명의 환자를 맡고, 차지널스를
해준 S가 6명의 환자를 맡으며 11시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상급종합병원에 해당하는 급성기 병동에서 평소에 5명을 맡는 간호사가 7명을 맡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길까?
가장 먼저 할 일은 업무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어떤 환자가 가장 응급인지를 판단해서 어떤 식으로 시간관리를 하며 아침까지 약을 주고 환자를 관찰하며 간호중재를 할지 계획을 세우고 정리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업무는 계속 밀리고, 갑자기 응급상황이라도 생기면? 생각도 하기 싫다.
아침에 인계를 주는 것도 부담이다. 고작 2명이 추가되었지만, 환자를 파악하고 인계를 주어야하기 때문에 차트도 들여다봐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어떤 간호사들은 그냥 환자 숨 쉬고 있으면 내가 잘한 거다 말하기도 하는데 그 정도로 쉬운 듯하면서 어렵고 힘든 것이 간호사의 일이다.
갑자기 환자상태가 나빠져서 수혈을 하거나, 전해질 불균형으로 보충해야 되는 상황이 되거나 하면 화장실도 못 가고 앉지도 못하면서 아침을 맞이해야 한다. 칼륨수치가 많이 낮으면 IV 칼륨을 6팩을 연달아 주게 되는데 그 말은 한 시간마다 환자방에 들어가서 약을 바꿔달아줘야 한다는 의미이고 최소 6시간은 환자에게 눈을 대 놓고 있거나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데이간호사들이 그런 환자를 넘기고 갈 때 많이 미안해하는 이유이다. 칼륨은 심장에 큰 영향을 주는 전해질이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양을 줄 수 없고, 그 때문에 작은 백을 천천히 주면서 여러 번 나눠주도록 프로토콜이 되어있기 때문에 가장 까다로운 업무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날 나는 그 일에 당첨되었다. 낮에는 아무 문제없었다던 할머니 환자가 매일밤 루틴으로 하는 피검사에서 칼륨수치가 꽤 낮았고, 보충프로토콜을 따르려니 7명 환자를 보는 중에 6시간 동안 1시간마다 약을 주러 들어가야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 시간이 짧지 않은데 그게 뭐 힘들어? 생각할 수 있는데 단편적으로 60분을 7명으로 쪼개서 챙긴다고 보면, 한 사람에게 채 10분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인 거다. 약을 주거나, 환자가 통증이 있다거나, 혈압이나 혈당이 비정상수치에 해당된다거나, 상처나 소변 대변주머니를 가진 환자가 있거나, 침상에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해서 몸을 돌려주고 배변하면 닦아줘야 하는 환자들을 7명 본다고 가정해 보자. 한 사람에게 10분씩 할애한다고 해서 과연 쉬면서, 놀면서 일할 수 있을까? 내가 나열하면서도 숨 가쁘고 고개를 내젓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보통의 상황이다.
일단 모든 환자가 숨 잘 쉬고, 가장 중요한 간호포인트를 완료하고 퇴근하는 게 목표다. 차팅도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라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한 명씩 완성해야 한다. 우리 병원에서는 팔러시 상 8시간 이상 환자를 담당하는 경우에는 케어플랜을 작성해야 하는데, 환자를 담당한 간호사에겐 가장 중요한 업무일지이기도 하고 다음번 간호사가 중요한 정보를 확인하는 기록이기도 해서 가능하면 나는 꼼꼼하고 세세하게 기록을 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적으면서 빠진 거 없나 찾아보기도 하니 업무시간 내에 못하면 퇴근은 무한정 길어지는 거다. 칼퇴가 나의 매일의 목표이기에 앉지도 못하고 환자 약 주러 가는 길에 복도에 서서 차팅을 했다.
시계를 보지만 다음 일 뭐 해야 하는지 정리하려고 보는 것이지 진짜 시간을 이해한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여유가 있어야 몇 시인지 보면서 이제 근무가 몇 시간 남았구나, 집에 가고 싶다, 뭐 이런 생각이 가능하지 바쁘면 시간은 그냥 숫자다. 4:56이니까 5시 약 줘야 하고, 늦어도 5:29까지는 약을 줘야 하니까 그전에 다른 환자 포지션체인지 하고 오면 되겠다 계획하면서 또 다른 환자 바이탈을 확인하는 그런 식이다. 그나마 영타를 빨리 치는 편이라서(한매타자라고 아는가? 이거 알면 옛날사람인데 영타 700-1000타 찍던 과거가 있다) 차팅에서 효율이 나는 것이지 독수리로 찍고 있으면 난 집에 못 간다. 병원에서 퇴근 시간 이후에 1분도 더 있기 싫은 건 변함이 없기에 그 많은 환자의 업무를 정리해 나가며(?) 집에 갈 궁리를 했다.
각자 너무 바쁜 나머지 서로 도와줄까? 괜찮니? 물어볼 새도 없이 7시가 되었다. 다행히 약 다 돌렸고, 검사결과 다 확인했고, 바이탈 괜찮았다. 이제 인계만 주면 집에 간다. 보통 인계가 끝날 때까지는 나도 모르게 긴장모드가 켜져 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실수한 것이나 빼먹은 일은 없는지 인계를 주면서도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데이간호사에게도 질문 있는지 물어보면서 최대한 내 업무를 마무리한다. 7명의 인계가 다 끝나고 데이간호사들의 고생했다는 인사를 끝으로 퇴근을 찍고, 당연히 중간에 쉬러 가지 못했으므로 추가수당 받는 종이에 당당히 돈 더 줘라! 는 의미로 기록을 남기고 총총 집으로 퇴장했다. 6명 이상을 본 경우에는 따로 기록을 남기는 데,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 부분도 급여에 추가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자본주의가 이럴 땐 좋다.
꽤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당연히 5명도 바쁠 때가 대부분이라 힘들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7명을 어떻게든 보기는 했다는 사실에 나 자신이 대단하게 보였다. 사람을 쥐어짜면 성과가 나온다는 슬픈 사실도..
그러면서 간호사들이 몇 명의 환자를 보는가에 대한 기준이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법적으로 이 부분을 못 박아두기도 했는데, 절대로 일반병동에서는 1:5 이상의 비율은 허용하지 않는다. 특수한 상황에서는 예외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기준을 지키도록 강제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미시간주는 법적으로 정해진 Ratio는 없지만, 중증도가 가장 높은 병원은 1:3 또는 1:4로 데이시프트가 정해져 있고 나이트는 1명씩 더 맡는 구조이다. 당연히도 중증도가 낮은 병원은 간호사가 맡는 환자의 수가 더 많을 수밖에 없으며, 내가 아는 다른 병원은 나이트에 1:7의 ratio를 유지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의학적으로는 위험하지 않은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의 환자를 맡겠지만 결국 사람이 직접 해야만 되는 일들이기에 쉽지 않을 거라 느껴진다.
한국간호사로서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알게 되는 많은 차이들은 나에게 그만큼 많은 생각을 안겨준다. 우리나라는 간호사가 꼭 필요한 인력이라는 생각보다는 그저 의사를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짙다. 그러다 보니 전문직이라는 카테고리에 법적으로는 포함되어 있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부분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다.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한 예로, 은행에서 대출을 신청할 일이 있을 때 의사는 전문가대출이 적용되는데 간호사는 해당되지 않는다. 한 은행에서 의료인대출이라는 상품을 들은 적은 있는데 한도나 이율등이 월등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간호사가 당연히 의사처럼 전문직에 들어가기 때문에 현재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면 아주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다. 최근에 집을 구입하려고 슬슬 알아보면서 동료에게 이야기를 꺼내니, 우리 직업에 지금 직장이면 대출 정말 잘 나온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수입이 좋은 직업이고 미래의 안정성도 보장되기에 은행에서는 돈을 안 빌려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또 한 번, 앞으로는 한국에 되돌아간다고 해도 간호사로 일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좋은 대우가 있다는 걸 알았는데 좋지 못한 대우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도 섣불리 하기 힘든 어려운 일들을 기꺼이 하는 전문가들에게 합당한 비용과 대우를 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미 많은 분야에서 선진국으로 불리는 우리나라의 의료환경이 진정 선진국이 되기를 바란다. 7명의 환자를 간호하는 일이 부담이 될 만큼 간호사들이 일하는 환경이 업무에 집중되고 전문적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처럼 태움과 고단한 업무 때문에 임상을 탈출하는 간호사들이 줄어들고 평생을 간호사로 임상에 머무르며 빛나는 경력을 환자에게 정성껏 쏟을 수 있는 분위기가 생겨나길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