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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나도 미국 시니어 널스?

아직 초짜한테 이러지 마세요!

by 미국간호사 Sophia

출근 전부터 불안함이 밀려왔다. 매니저가 도대체 근무를 어떻게 짜길래 내가 오늘 근무의 최고 고참이 된 건가... 내 환자 12시간 보기만 하는 것도 항상 초 긴장 상태로 보내는데 우리 부서를 책임지는 차지널스라니! 쫄보인 나는 너무 무섭다. 제발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게 병원인데. 뭐든 처음은 다 무섭지 않은가 그래도 잘할 수 있을 거다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는데 더 큰일인 건 간호사 4명인데 그중 두 명이 플롯(float) 널스다. 경력 빵빵한 자유로운 영혼의 간호사들도 있지만 젊은데 얽매이지 싫은 초짜들도 많다. 누가 올지 모르는데 제발 제발 알아서 일 잘하는 간호사들이 오게 해 주세요!


속으론 벌벌 떨어도 겉으론 괜찮은 척 출근해서는 데이근무 팀들한테 앓는 소리를 실컷 했다. 나 너무 긴장된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나 그냥 집에 가면 안 되겠냐 등등. 평소에 불평 안 하고 주는 대로 일하는 내가 오자마자 이야기를 하니 부매니저가 첫 4시간에는 자기도 있을 거라며 걱정히지 말라고 안심을 시킨다. 그럼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8시간은 괜찮고? 일을 안 할 수도 없고 하자니 부담 백만 퍼센트인 상태로 밤근무가 시작되었다.


저녁 7시부터 밤 12시간을 대체하러 와준 간호사는 에이전시에서 온 간호사 J. 경력을 물어보니 7년가량 되었다는데 기본적인 병동 필요사항만 알려주니 알아서 일을 하기 시작해서 너무나 안심이 되었다. 9시쯤 스태핑부서에서 연락이 와서 밤동안 근무하는 인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11시부터는 또 다른 간호사가 올 것이지만 인력이 많지 않아서 환자는 5명씩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것도 나름 괜찮았다. 밤동안 응급상황 없이 아침이 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부매니저가 4시간을 대체근무 해준 뒤 그 자리에는 다른 부서에서 꽤 오랜 경력을 가진 간호사 S가 와주었다. 원래 부서도 같은 내과라서 보는 환자도 거의 같고 워낙 시니어 널스라서 오히려 내가 든든할 지경이었다. 입원환자를 받길래 내가 도와줄게 하니까 쿨하게 괜찮다고 하더니, 그렇게 온 환자가 상태가 좋지 못해 오자마자 중환자실로 보내야 된다고 하면서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차지널스로서 좀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순간이었다. 왜냐면 나는 중환자실에 보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 나보다도 훨씬 병원사정을 잘 아는 다른 유닛 널스 S 덕분에 오늘 이런 멤버들로 근무가 짜인 게 너무 고마운 상황이었다. 난 아직도 차지널스 업무를 하는 게 너무 버겁다.


그리곤 갑자기 옆병동에서 일하던 시니어널스가 두 명이나 왔다. 그러면서 별일 없느냐고 묻고는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꼭 알려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원래 옆병동에서 근무하던 간호사가 부매니저가 되면서 우리 병동과 옆병동을 같이 관리하는 관리자가 되었는데, 4시간 병동에서 일해준 것도 모자라서 퇴근하기 전에 옆병동에 오늘 주니어들만 근무하고 있으니 잘 챙겨달라는 말을 하고 갔다고 했다. 크.. 감동이었다.

사실 그런 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긴 하다. 어차피 우리 병동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결국 우리 병동사람들끼리 해결해야 하는 게 당연하고 도움을 받는다는 게 익숙하지 않았는데 이곳, 미국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서로 돕고 챙기는 것이 당연한 팀워크의 하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조무사들도 결근을 하거나 다른 부서에서 플롯을 오는 경우가 요즘 좀 잦았는데 오늘은 우리 병동 조무사들 중 일 잘하는 멤버들이 들어왔다. 너무나 반갑고 든든했다.


최대한 침착하게 일하려고 내 환자들부터 먼저 빨리 챙기고 약을 돌린 뒤, 특별히 문제가 있는 환자들이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최근 들어 가장 중증도가 적은 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손이 많이 가는 환자들은 언제나 있지만 행동이나 정신병력에 위험이 있거나 치매등의 정신적인 문제로 지남력이 없는 환자도 없다. 이게 얼마나 다행인 상황인지 간호사라면 이해할 것이다. 자정이 넘어가면서 업무의 속도가 조금 한가해지면, 간호사들과 조무사들이 돌아가며 쉬는 시간을 가지는데 나는 평소에도 쉬러 가지 않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밤에는 쉬러 가면 마음이 편하지 않고 쉬는 동안 잠을 자려고 해도 쉽게 잠들지 못해서 그냥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간식을 꺼내먹고 5-10분 정도 알람을 맞춰놓고 눈을 감고 쉬는 것이 내 스타일이다. 데이근무 때는 무조건 밥도 먹고 쉬러 가긴 했다) 오늘은 더욱이 긴장이 심해서 쉴 생각조차 안 하기도 했다.


사람이 극도의 불안과 걱정으로 전투태세를 갖추다 보면 오히려 웬만한 일들은 무난하고 쉽게 느껴진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책임감이 큰 역할을 해야만 하는 날이라서 긴장과 최대한의 준비로 맞서다 보니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럭키한 밤이 지나갔다. 아침이 오고 데이근무간호사들이 출근하자 ‘이제 끝났다!’는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아침조회인 허들을 하러 가기 전에 우리 병동에 일하러 와준 플롯널스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넨 후,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인계를 하고 퇴근을 했다.




분명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아직 스스로는 충분한 능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도 주어진 부담스러운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도망치고 싶을 만큼 너무 무섭고 하기 싫은 자리를 차지해야만 하는 일들 말이다. 특히, 한국의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대치의 업무를 해야만 하기 때문에 언제나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버거워하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야만 하는 근무가 정말 다반사다. 그런데다 그런 경우의 거의 모두가 기댈 곳 없이, 물어볼 곳 없이 막막하고 두려운 마음을 억지로 감춘 채 해 내야만 하는 상황이라 극한의 공포와 책임감 사이에서 나를 벼랑으로 몰아세우며 버텨내는 것뿐이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어떤 사람은 성장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상처를 얻는다. 아무리 용기를 가지려고 해도 안 되는 일은 있기 마련이기에.


지금 경력상 나는 아직 주니어와 시니어 널스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주니어 < 시니어 순으로 경력과 연차가 높다) 중간에 일을 쉰 적이 있어서 몇 년은 경력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도 10년 이상의 경력이 있기에 한국에서는 완연한 시니어 널스이긴 한데, 미국에서는 특히 내가 일하고 있는 병동에서는 내 경력은 아직 확실히 주니어의 영역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 병동에서 시니어 위치에 있는 간호사들은 최소 20년 경력이상이기도 하고 그 수가 전체 간호사의 절반은 되기 때문. 듣던 대로 미국은 간호사의 근속연수와 경력의 수준이 한국과 달리 매우 길고, 이 때문에 이런 간호사들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모셔오는 해외간호사는 아무리 적어도 7-8년의 경력을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서 신규나 3년 이하의 경력으로 미국행을 준비하거나 고려하는 간호사분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는데, 좋은 조건의 병원을 찾기 힘든 가장 큰 이유가 경력이다. 예로, 함께 일하는 필리피노 간호사들은 아무리 적어도 임상에서만 경력이 8-10년인 상태에서 미국에 왔고 15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친구들도 정말 많았다. 실력과 능력의 질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경력은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미국 간호계에서는 통한다. 나도 경력이 꽤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고 미국에 좀 더 일찍 오면 좋았을 거라 처음엔 생각했는데 막상 와보니 지금이 딱 적당한(?) 경력을 채우고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걸 보면 우리나라와 미국의 간호환경이 참 다른 것 같다.


절대 미국을 찬양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과 비교해도 결코 만만치 않은 환경에서 아픈 환자들을 돌보는 간호사로서 임상에서 느끼는 책임감과 두려움을 굳이 비교하자면, 미국에서는 내가 어떤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모든 짐을 다 지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면 모두가 내 일처럼 나서서 도움을 주려고 애를 썼다. 그중의 일부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채워주기도 했고, 또 다른 일부는 나의 부담감을 이해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선천적으로 나는 겁이 많고 아주 예민한 사람이다. 그래서 뭐든 시작할 때 뜸을 많이

들이고 한발 떼는 것이 많이 어려운 사람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왜 이렇게 소극적으로 일하나?”는 말이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고 자신감도 없는 데다 사람의 목숨과 직결되는 일을 하는 직업이기에 쉽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참 많은 오해를 들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여 그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기면 처음 나에게 독설을 했던 사람들이 또 다른 말을 한다. “어제까지 하나도 못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잘해요?”라고.. 나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나 자신에게 엄격하기에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그래서 남들보다 잘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이곳에서는 각자의 속도와 방법이 다를 수 있다는 차이를 인정하고, 가르쳐준 대로 하지 않았을 때 다그치고 혼내는 것이 아닌 그렇게 하는 이유를 묻는다. 그리고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목적을 달성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새로운 발견이라 생각하고 인정해 준다. 그리고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발생할 여지가 있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의 방법을 비난하지 않는 선에서 기존의 교육방법대로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설득시킨다. 개인적으론 이런 방법이 합리적이고 성숙하며 발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예상치 못했던 차지널스 경험으로 또 한 번 한국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던 임상의 길을, 미국에서는 해낼 수 있었던 차이를 느끼게 된 하루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개인을 살펴보면 정말 똑똑하고 이성적이고 센스가 좋다. 그런데 모여서 그룹을 이루고 무리가 생기면 시너지가 나지 않는다. 남과 비교하기 바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는 일에 인색하다. 그런데 이런 성향은 개인의 문제라서일까? 미국에서 본 대부분의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 비해 개인능력이 뛰어난 건 절대 아닌 것 같다. 평균적으로 보더라도 똑똑하고 센스가 있다고 느낄만한 사람들은 가뭄에 콩 나듯 한다. 그럼에도 이 나라가 이렇게 건설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시스템이라고 본다. 부족한 개개인이 모이더라도 이해하고 인정하고 보완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그릇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며, 누군가에게는 없는 능력을 또 다른 누군가가 채울 수 있음을 알기에 조직 안에 모인 사람들을 감싸고 격려하며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시스템을 이용하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모두가 모든 곳에서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경험한 꽤 많은 부분에서 그렇게 느낀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작은 땅에서, 천연자원도 풍부하지 않은, 식민지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대한민국이 인력의 질이 좋은 나라가 되어 선진국이라 불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며 노력했던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시스템을 현재 환경에 맞추어 재편성하고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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