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익선의 또 다른 이름
나처럼 한국의 간호사들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많은 분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이민이 아니더라도 유학, 주재원, 국제결혼 등 미국에 가는 이유는 더 많다. 그래서 영어는 항상 우리들의 초유의 관심사이다. 주이민신청자와 함께 가는 가족의 경우에는 수준 높은 영어를 필수로 요구하지는 않기에 조금은 편안할 수 있겠지만 결국 언어가 다른 나라에 살아본다는 것은, 마치 컴퓨터게임에서 레벨을 올리며 만렙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만큼이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투자되어야 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간호사로 이민을 간다고 하면 주변에서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이 영어인 것 같다. 나 역시 "영어 엄청 잘하겠다." "도대체 얼마나 영어를 잘하길래 미국 이민을 가는 거냐?", "그 정도면 원어민 아니냐?"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받아왔다. 거기에 내가 항상 해왔던 대답은, 이미 미국에서 일하고 계신 한국간호사들이나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영어성적을 받으신 분들은 정확히 이해하실 텐데 "내 영어는 아직도 부족하고, 영어야말로 잘할수록 좋다"였다. 그야말로 해외살이를 하는 사람에게 영어란 다다익선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나는 2020년도 9월에 미국영주권을 받기 위해 거쳐가는 여러 과정 중 '비자스크린'이라는 서류를 완료하였는데, 이 서류를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이며 어쩌면 제일 중요한 것이 -비영어권국가에서 학업이나 거주를 해온 사람에게- 적정이상의 영어점수이다. 아이엘츠 아카데믹모듈 기준 오버롤6.5 & 스피킹 7.0 이상인데 이 점수에 대한 감을 한 번 잡아보겠다.
1. 미국에서 대학/대학원과정에 지원하는 유학생에게 학문적인 영어사용을 위해서는 아카데믹모듈로 최소 오버롤 6.0 이상을 전공과 대학/대학원이 요구하게 된다.
2. 이민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은 아카데믹모듈이 아닌 제너럴모듈로(아카데믹보다는 실용영어에 가깝다) 오버롤 5.0 이상을 평균적으로 요구한다.
이와 같이 미국간호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영어점수는, 비록 이민을 준비하고 있지만 대학원에서 요구하는 수준보다 높은 학문적인 영어사용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미국간호사라는 타이틀이 엄청난 능력이 있음을 반증한다고 생각해 주시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막막한 산을 수월히 넘어갈 희소식이 있다. 2022년 7월을 기준으로, 미국에서 끊임없이 대두되는 간호사 부족으로 인해 더 이상 미국전역에 있는 간호사로는 충분한 인력을 대비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례적으로 비자스크린에 포함하는 영어시험을 기존 토플과 아이엘츠뿐만 아니라 토익/오이티/피티이 등의 비교적 점수를 받기 쉬운 시험을 추가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나를 비롯해 아이엘츠지옥에 빠져있던 많은 한국간호사들이 재빠르게 토익으로 노선을 변경하였고 조금은 수월한 방법으로 비자스크린을 무사히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또, 개인적으로는 항상 귀를 열어놓고 최신경향을 탐색하던 영국, 호주, 뉴질랜드까지 영어점수나 다른 조건들을 완화하여 해외로부터 경력간호사들이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많이 자신의 나라에서 일해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영국은 아이엘츠에서 라이팅 점수 때문에 좌절하는 간호사들에게 0.5점을 내린 점수를 허용하였고, 호주나 뉴질랜드의 경우에는 한국면허를 쉽게 이전할 수 있도록 절차를 수정하고 특히 뉴질랜드의 경우 영주권까지 취업만 되어도 신청할 수 있도록 정책을 바꾸었다. 앞으로 한국간호사에게 이만큼 좋은 기회가 또 올 수 있을까 싶은 정말 대단한 현재이다.
그러나 반전은 미국에 도착해서다. 쉽게 필요한 점수를 얻는다는 말은 달리말하면, 영어실력이 중상급정도는 아니더라도 미국간호사 되기가 합법적으로는 가능하다는 뜻인데 이걸 무작정 좋다고 하기가 어렵다. 미국에 도착해서 집을 구하고, 차를 사고, 은행과 운전면허센터 등을 다니며 정착생활을 하고, 병원에서 면접(잡인터뷰)을 보게 되거나, 그 이외에도 새로운 곳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일에서 버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고 특히 출근을 하게 되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들렸던 영어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토플과 아이엘츠로 어렵게 점수를 받은 분들 조차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있어서 그간 공부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비자스크린에서 왜 그토록 어려운 점수를 요구했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결국 시험은 시험일뿐, 살아가는데 필요한 언어 특히 의료인으로서 환자와 동료들과 소통하며 돈을 벌기 위해 쓰는 영어의 수준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내가 미국에서 교환학생을 하던 시절에 듣고 나서 한참이 지난 뒤에 무릎을 쳤던 말이 있다. "돈을 쓰는 영어는 쉽지만, 돈을 버는 영어는 어렵다." 누구에게 들었는지, 어디에서 본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교환학생 시절 공부하며 여행을 다니며 영어를 웬만큼 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아이엘츠 점수를 받으면서 그 말의 의미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 아마 나도 미국생활을 하면서 더 절실히 그 말에 동의하게 될 것 같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이 안 그래도 어렵게 느껴지던 영어를 나 때문에 더 두렵게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된다. 영어를 비롯한 언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나 역시 시험을 준비하면서 다시는 영어로 시험을 치고 싶지 않을 만큼 진절머리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배워서 수준급으로 쓸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어는 세계에서 가장 어렵기로 손꼽히는 언어이다. 그만큼 우리는 수준 높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기에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난 이후에 당사자가 가지는 시너지는 엄청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명석한 두뇌와 성실함은 아무나 따라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언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내가 이루기 위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므로, 원어민 수준의 영어가 필요한 소수를 제외한다면 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남에게 전달하고, 남이 하는 이야기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으면 일단은 성공이다. 오랜 기간 살면서 느끼는 어려움은 결국 극복해 내야 할 몫이겠지만, 아직 시작해보지 않은 해외생활을 외국어로 인해 너무 두려워만 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걸 겪을 나에게도 용기를 내라고 미리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