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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국간호사 Sophia Jun 24. 2024

한국 병원 근무 경험기 -6

다시 병동으로 돌아가다

 회사를 다닌 지 일 년이 다 되었을 무렵 이민비자의 마지막 관문인 대사관인터뷰가 확정되었다. 이제 영사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비자를 받으면 미국으로 출국하는 것만 남았다.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이민절차의 마지막을 앞두고 설렘이 큰 상태였다. 몇 가지 이유가 있긴 했지만 출국 전에 좀 쉬었다가 인터뷰를 하고 여유롭게 짐을 싸고 싶어서 회사에 퇴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인사도 했다.


퇴사를 하고 인터뷰를 기다리는 기간은 정말 즐거웠다. 맛있는 것도 먹고 집에 있는 잡동사니를 처분하면서 짐을 어찌 쌀지 궁리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섣부른 생각을 한 것일까? 인터뷰 날짜가 거의 다가온 4월 초에 대사관으로부터 5월 예정이었던 비자인터뷰가 취소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이민 문호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매년 미국에서 이민을 받아주는 인원수를 정해두고 그 인원이 차면 더 이상 같은 해에는 이민을 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민을 신청하는 나라에 따라 카테고리가 나뉘어 있는데, 필리핀과 인도, 중국과 같은 나라들은 인구가 많고 그만큼 이민신청자도 많아서 각각의 쿼터가 있고 우리나라는 그에 비해서는 극히 소수민족이기에 나머지 나라 항목에(other countries) 포함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나라별로 지원하는 인원수에 따라서 모든 준비가 다 되어있다고 해도 이민문호가 닫혔다고 말하는 상황이 생기게 된다.


내가 수속을 시작한 것은 한참 코로나가 창궐하여 세계가 시끄러울 때였는데, 그때는 모든 나라가 감염위험을 피하려 문을 걸어 잠글 때여서 이민을 가려는 사람들도 주춤했었다. 우리나라 역시 미국보다는 한국이 안전하다는 생각에 이민비자 신청자가 줄었고 꽉 막혔던 고속도로가 뻥 뚫리듯 이 기간은 초고속의 속도로 이민비자를 받은 사람이 있기도 했다. 그러다 감염병이 풍토병으로 바뀌고 사람들의 일상이 어느 정도 돌아오고 나니 다시 이민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수속의 마지막단계에 왔을 때 그 해에 정해둔 비자가 소진되어 소위 문을 닫게 된 것이었다.


처음엔 상황파악이 안 되었고 눈앞이 캄캄했지만 한편으론 이제 인터뷰만 보면 되는 거니까 금방 해결되겠지 생각했다.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뭘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또 내가 가지고 있던 뉴욕주의 간호사면허를 정착하게 될 미시간주의 면허로 바꾸는 과정에 신경을 써야만 했고, 이를 위해 영어시험을 다시 쳐야 해서 영어공부 이외의 다른 모든 일은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더 흘렀고 영어점수는 목표한 만큼 나오지 않았으며 백수로 지내며 영어시험비용에 생활비까지 쓰다 보니 자금도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새로운 회계연도가 되어 비자쿼터가 새로 생성되었음에도 이미 밀려있는 사람들부터 순서대로 비자를 주다 보니 그 뒤로도 몇 달간은 내 순서가 오지 않았다.


  문호가 닫혔을 때 바로 다음 계획을 세우고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취업을 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얼마나 일을 하다 미국에 가게 될지 한 치 앞을 모르는 내 상황 때문이었다. 내 입장만 생각해서 입사를 하기에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만둔 회사에서는 나의 퇴직사유를 알고 있었고 사실을 숨기고 취업을 하기에 건설업계는 매우 좁은 세상이었다. 곧 그만두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뽑아줄 회사는 없을 것이고 혹시 모르게 일하게 되더라도 오래 다닐 것처럼 말하는 것 자체가 속이는 행위이기에 마음이 불편해서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

병원으로 가는 것은 더욱 싫었다. 체력적으로도 힘들었지만 꼬집어 설명하기 힘든 병동이라는 곳의 공통적인 분위기, 소위 병동 문화가 나에게는 매우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어차피 미국에 갈 것이기에 불편하고 힘든 것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고민이 길었고 마음은 불편했지만 결론은 의외로 쉽게 났다. 내가 일하게 될 미국의 병원에서 내가 최근에 일한 곳이 병원이 아니기도 하고 퇴사 후 한동안 일을 그만두고 쉬고 있으니 경력의 공백이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미국에 오기 전까지만이라도 다시 병원에서 근무를 하다가 오는 것을 권고한다는 공지를 주었다.


미국에서는 해외의 경력간호사를 미국으로 데려오는 조건으로 많은 돈을 쓴다. 특히 나처럼 에이전시가 아닌 병원직접고용인 경우에는 정말 많은 대우를 해준다. 그 모든 대접의 이유는 하나이다. 당장 여기 오자마자 능력을 발휘해 줄 간호사가 필요해서. 그렇기에 나에게도 최근까지 일을 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한국의 간호사들은 미국에 비하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도 정말 일을 잘한다.(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나는 쪼렙이다) 그래서 업무에 관해서는 같은 기간 미국에서 일한 간호사에게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일단 그걸 모른다. 그냥 다들 자기네들처럼 일한다고 생각하고 또 경력을 엄청 중요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미국에 입국하기 직전까지 병원에서 일하다 오는 것을 너무나 환영한다. 게다가 나는 규모가 큰 병원으로 가는 것이기에 병원에서도 단호하게 경력이 필요하다고 말을 한다. 그러니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어느 병원이든 들어가서 일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부름이 오면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집에서 30분-1시간 거리의 종합병원에 지원을 부랴부랴 했다. 그러나 내가 회사생활을 했던 그 일 년 동안 상황이 많이 변해있었다.


이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대형병원들은 경력이 적지만 또는 없지만 나이가 어려서 세상물정을 모르고 핑크빛 미래를 꿈꾸며 회사를 위해 희생해 줄 신규들을 더 선호한다. 경력이 있는 간호사가 분명 필요할 텐데도 그 경력을 급여에 반영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굳이 뽑지 않는다. 나이가 많으면 결혼해서 아이가 있을 확률이 높고 그렇게 되면 회사에서 원하는 대로 일을 시키기에 불편한 상황이 생길 확률 역시 높다. 나는 비록 병동에서 일한 경력이 많지는 않지만 간호사로 일한 경력은 10년 이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나이도 많을 것이고 병원에서 입맛대로 일을 시키기에는 아쉬움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경력을 후려쳐서 급여를 줄이고 합격을 시키거나 그냥 경력 없는 간호사를 뽑는다. 이렇게 긴 이야기를 한 이유는 400 병상이상의 종합병원에서는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아예 서류탈락을 시켰다. 단 한 곳의 대학병원에서는 전담간호사업무에 지원을 해서 면접까지 봤으나 합격불합격의 결과도 알려주지 않는 상태에서 새롭게 공고를 내는 바람에 내가 반대로 전화를 걸어 결과를 확인한 경우도 있었다. 자존심 별로 없지만 그나마도 정말 상했다. 안 뽑을 거면 불합격이라고 안내는 해줘야지 떡하니 기간변경해서 같은 공고를 내다니 사람을 사람답게 취급하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인사과 담당자가 업무가 너무 바빠서 깜박했다고 미안하단다. 할 말은 많지만 그냥 안 했다. 그 병원에는 환자로도 안 갈 생각이다.


미국병원과의 약속은 지켜야 했기에 눈을 낮추고 인력이 항시 부족한 병원을 찾았다. 그 사이 갑작스레 문호가 열려 비자인터뷰 일정이 다시 잡혔고 인터뷰가 끝나면 출국일정이니 최대한 빨리 입사를 해야 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였다.


 인력이 없어 쩔쩔매는 병원도 겉으로는 매우 도도했다. 뭐 어쩔 수 없었다. 낮은 자세로 저를 뽑아주십사 읍소했다. 그리하여 비자인터뷰 다음날부터 집 근처 작은 종합병원 내과병동에서 일을 하기로 했고 한시름 놓았다.


드디어 비자인터뷰를 보았고 비자도 승인이 되었다. 그 길었던 이민의 여정 중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이제 끝난 것이다. 이제는 길어봐야 두서너 달 일하다 한국을 떠날 것이니 일하고 집에 오면 이삿짐이나 슬슬 싸야겠다고 생각하며 첫 출근을 했다. 그런데 가자마다 내 계획은 이미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업무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병동이었다. 환자수가 엄청났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주사약이 끊임없이 있었다. 약 주고 돌아서면 다음약 주고, 또 돌아서면 다음약을 주며 돌아다니는 일을 해야 했다. 오랜만에 병원에 다시 출근하는 바람에 일하는 감을 잃었을까 봐 긴장도 엄청나게 했더니 일하며 비지땀을 엄청나게 흘렸다. 한겨울에도 간호복이 흠뻑 젖을 만큼 더웠다.

다만, 워낙 인력난에 시달리는 병원이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정말 친절했다. 첫 출근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경력 많은 선생님이 커피나 음료수를 사주셨고 나는 너무 더웠기에 미안하지만 고맙게 덥석 받아가며 일을 했다. 일이 바쁘고 힘들며 급여가 쥐꼬리만 하기에 들어오는 인력보다는 나가는 인력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기존에 일하고 계신 분들은 다들 나이가 적지 않고, 집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노느니 나와서 돈이나 벌겠다는 마음으로 일하는 것 같았다. 나는 경력이 필요해서 온 것이라 뼈를 묻을 간절함은 없었지만 화장실 가는 시간에 겨우 쉴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내가 요령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겨울의 내과병동은 호흡기질환 환자들의 성수기이다. 게다가 한겨울인데도 장염환자는 왜 이리 많은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퇴원을 하기가 무섭게 새로운 환자가 입원을 한다. 내과인데도 병실이 남아있으면 외과환자도 입원을 하는 소위 잡과였다. 거기에 시골이라 어르신들이 주기적으로 영양제를 맞으러 입원하는데 보호자로 오신 할머니 한 분은 남편간호하다가 본인도 입원해서 영양제를 맞고 계셨다. 나는 큰 병원에서만 일해봤기에 신기하기도 재밌기도 한 경험이었다. 그래도 시골인심이려나? 딸처럼, 손녀처럼 대해 주시고 며칠 입원해 계시니 친해지기도 하고 해서 일하는 것 자체가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너무 급히 일을 구한 것일까? 입사한 지 일주일이 넘도록 근로계약서를 쓰지도 않고, 면접 때도 어영부영 넘어가며 연봉을 말해주지 않더니 결국 염려하던 일이 터졌다. 시골병원에서 간호사에게 주는 급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이미 예상은 했다. 그럼에도 이 지역에서는 높은 편이라는 말에 기대감도 있었는데... 근로계약서를 언제 쓰냐고 물은 그날 오후 근무 중 총무과장님의 호출을 받고 계약서를 쓰러 가서는 또 사직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쯤 되면 나에게 핑계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싶다. 그냥 욕심 내려놓고 다니면 될 것을 매번 이런저런 이유로 그만두는 것을 보면 습관인가 싶고, 뭐 그리 잘났기에 따지는 게 많냐고 할 수도 있겠다. 변명하자면 나는 간호사라는 직업이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는 직업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그 직업을 가져서만이 아니라 그만큼 간호사는 수많은 대단한 일을 실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건강을 회복하도록 돕는 일은 그저 몇 가지 숙지하고 반복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의사 밑에 간호사라는 인식이 많은데, 엄연히 의사와 간호사는 같은 의료인이며 업무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내가 미국에서 간호사를 하고 싶고, 이를 위해 이민이라는 것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다. 이곳에서는 간호사와 의사는 동등한 의료인이다. 물론 일부 특정 분야의 의사가 월등히 돈을 잘 벌기는 하기에 그 안에서도 편가르는 이야기도 있지만 큰 틀에서는 그렇다. 애초에 이 사실을 몰랐다면 나는 한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것을 그저 운명이며 사명으로 여기고 봉사하는 마음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은 일을 하고도 더 나은, 어쩌면 당연한 대가와 대우를 받는 곳이 있는데 경험해보고 싶은 게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이런 개똥철학이 있는 나에게 다시금 맘먹고 들어온 내과병동은 큰 실망감과 허탈함을 주었고 다음날 바로 면담을 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결국 이곳에서도 채 보름을 일하지 못했다. 연봉을 알았더면 아예 출근을 안 했을 것이다. 트레이닝기간이었기 때문에 인력이 부족한 상황은 아니었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병원에서 계속 일하는 건 내 양심이 허락지 않았기에 얼른 그만두고 지원을 생각했던 다른 병원에 서류를 넣었다.


이렇게 짧은 나의 병원경력에서 나는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았고, 충분히 다시 병원에서 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내 머리와 손이 하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어느 병원을 가든지 잘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어느 정도 간호사의 업무가 보장되고 급여가 충족되는 곳을 찾아서 출국 전까지 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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