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함께 살며 여행 준비를 하면 장점과 단점이 극명하게 나뉜다.
장점: 돈과 시간을 들여 따로 만나지 않아도 된다.
단점:눈만 뜨면 얼굴을 마주하니 의견이 맞지 않아 기분이 상할 때 표정을 숨길수 없다.
결론:돈 들지 않는 썩소를 짓게 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어제저녁만 해도 그랬다. 배낭여행이 가져오는 피곤함과 어려움이 뭔지 모르는 우리 집 투머치 의욕 왕 아빠는 레이오버로 머물게 된 로마에서 아빠가 자체 제작한 '로마 역사 투어'에 온 식구가 동참해주길 원했다.
하지만 38도에 육박하는 이탈리아 여름 날씨를 견딜 자신이 없어 '그냥 훑고 지나가자'로 거절의 뜻을 밝혔다.
그다음은 로마 야경투어. 하지만 12시간의 비행 후 떡실신될 것이 뻔하기에 역시나 '놉!'.
계속된 거절이 문제였을까? 아빠는 '누가 이기나 해보자' 나는 듯 끊임없이 제안을 해왔다. 하지만 여행을 잘하기 위해선 역사 투어고, 나발이고 우선은 내 몸, 내 컨디션 관리가 최고이기에 거절의 뜻을 밝힌 것인데 그걸 알 리 없는 아빠의 끊임없는 제안=강요 때문에 출발 전부터 집안 분위기는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부녀간 대립구도가 팽팽해지니 여행 전 느껴야 하는 설렘도 당연히 반감되었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난 벌써부터 피곤에 지쳐 있었다. 그런데 아빠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장 내일이 출발인데 식구 누구도 아빠의 계획을 들으려 하지 않자 아빠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강제 계획 공표.
계획은 이랬다.
'니 말대로 첫날은 힘드니 야경투어를 못 하고, 역사투어는 날이 더워 못하니.'
다음날 일정을 콜로세움까지 도보로 걸어가 (호텔에서 2km) 그 중심을 기준으로 그 근처 관광지인 포로 로마노와 트레비 분수(2km), 진실의 입(2km)을 도보로 둘러본 후 호텔로 되돌아오자(3km) 것. 그런데 말이 쉽지 자그마치 9km 거리+관광을 단 7시간 안에 주파해야 한다는 말인데. '우리 혹시 극기 훈련 왔어요?'
책으로 이미 로마 한 바퀴를 돌고 온 아빠에겐 쉬워 보이는 일정이었겠지만 우린 혈혈단신 배낭족도 아니고, 미취학 어린이와 함께 하는 여행자 아닌가. 불가능에 가까운 계획이었다.
"아니... 아빠~! 어른들도 저렇게 여행하면 반도 못가 병나. 그런데 저 벅찬 일정을 애가 어떻게 따라가. 애들은 체력이 안돼서 무리했다간 애 병나."
"아니 애는 어차피 아빠가 유모차 태워 끌고 다닐 건데 뭐가 걱정이야?"
"여보~ 당신이 무슨 이팔청춘이야? 20킬로가 넘는 애를 아무리 유모차가 있다 한들 어떻게 끌고 다녀! 한국처럼 아스팔트 길도 아니고,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이상한 양반이야 의욕만 앞세우고.. 에휴."
아빠는 해보지도 않고 엄살부터 피운다며 되려 나를 답답해했고, 무조건 딸 편만 드는 부인을 서운해했다. 하지만 여기서 밀리면 이번 여행은 버리는 여행이 되기 때문에 나도 질 수 없었다. 물론 저렇게 극적일 수밖에 없는 아빠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난 '아빠 딸' 이기전에 '어린이의 엄마'가 아닌가. 아빠의 감정에 취해 아이는 나 몰라라 하며 맥없이 아빠의 의견만 옳다고 할 수는 없었다.
마음이 상하던 순간이었다. 내 입장을 몰라주는 아빠에게 서운해 삐지려던 순간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빠의 발언권을 높여준 '크루즈 여행경비'를 다시 돌려 드리려던 찰나였다.
오며 가며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가 무심한 목소리로 할아버지를 향해 광속구 폭격을 던졌다.
"할아버지?? 근데 할아버지는 막낸데 왜 자꾸 대장님처럼 굴어??"
"응???"
"아니, 할아버지!! 그렇잖아. 여행 가는데 대장님은 엄마랑 할머니야. 엄마는 예약하는데 대장이고, 할머니는 나 챙기는데 대장이야. 그리고 다음 대장은 나고. 근데 할아버지가 자꾸 대장님처럼 엄마랑 할머니한테 명령만 하니까 이상하잖아."
아이는 자기보다 막내인 할아버지가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상황이 이해할 수 없다며 짜증을 냈다.
마치 이렇게?
'할배요. 좀 보소! 넘버 쓰리도 가만히 있는데 왜 막내가 나서길 나섭니꽈!'
손녀딸의 팩트 폭격으로 모두가 '얼음'이 된 상황. 뭔가 맞는 말 같긴 한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고 그렇다고 꼬꼬마 손녀딸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변명을 하기엔 처량할 것 같고. 아빠는 당황함과 동시에 민망해졌는지 손녀딸을 향해 설명을 빙자한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할아버지는 혹시 엄마가 모를까 봐 알려주는 거지, 무슨 할아버지가 대장님처럼 굴었다고 그래..?"
"아닌데~계속 할머니랑 엄마를 앉으라고 하고, 할머니가 안된다고 그러면 왜 안되냐고 막 화내잖아."
"아이구~ 우리 손녀딸~!! 할아버지한테 오해를 했구나~ 저얼대 그런 거 아냐. 우리 이쁜 손녀딸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할아부지가 계획을 짠 거지 화내고 그런거 아니야 오해하지 마아"
아빠는 '집안의 절대 권력자'인 손녀딸에게 미움을 받게 되면 그 결과가 참담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에 최대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긋하게 손녀딸의 오해를 풀기 위해 애썼다. 그런 할아버지의 마음을 받아들인 것일까? 딸아이가 너그럽지만 강경한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마지막 일침을 쏘았다.
"할아버지~! 그럼 내 말 잘 들어봐. 이제부터 할아버지는 우리 중에 제일 막내야. 나는 할아버지보다 비행기를 한 번 더 탔는데 할아버지는 아니니까 내가 할아버지보다 높은 거야.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대장님 하려고 하지 말고, 알겠지??"
안절부절못하던 아빠는 손녀딸의 은혜와 같은 용서의 말에 넙죽 엎드려 알겠다고, 제발 오해를 풀어줍사 사정했고 아이는 '앞으로 실수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용서한다고 했다.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는데 속이 시원하다 못해 뻥 뚫렸다. 이 완벽한 서열 정리라니.
그렇게 손녀딸의 무서운 경고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아빤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 봤다. 여행에 들뜬 나머지 정신없이 앞서 나간 건 아닌지, 애쓰는 딸에게 부담을 준 것은 아닌지, 돈을 보태는 만큼 본전을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닌지.
"아~ 고 녀석! 할 말을 딱 없게 만드네....."
"그래... 내가 설레는 마음에 욕심이 많았나 보다. 네가 알아서 준비 잘하고 아빠가 도와줄 거 있으면 말해. "
최악의 여행이 될뻔한 상황은 아이의 사이다 발언으로 신속히 정리되었다. 아빤 그동안 준비해온 방대한 지식+리더에 대한 욕심은 잠시 마음에 담아두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 팀의 귀요미 막내로 합류하게 되었다. 비록 넘버 쓰리의 텃새에 눈치를 많이 보긴 했지만 이 또한 즐겁다 생각하는 '손녀 바보 막내' 말이다.
손녀딸의 구박 아닌 구박을 받으며 확실한 서열정리가 끝나고 나서야 우리의 여행은 편해질 수 있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 공항에 도착 후 수속을 끝내고 비행기 탑승을 하기 위해 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는데 갑자기 아이가 할아버지를 불러 세운다
"할아버지! 왜 먼저 앞으로 가고 그래? 할아버지는 내 조수인 거 잊었어? 내 뒤로 따라와야지!!"
울긋불긋 당황함이 꽃피운 아빠의 얼굴이 재미있다.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를 자유자재로 조련하는(?) 딸내미가 사실은 우리 중에 진정한 리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구부정하게 멈춰 서있는 아빠에게 다가가 어깨를 쓰다듬으며 한 마디 건넸다.
"어이! 막내!! 선배 말 잘 들어. 안 그럼 안 데리고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