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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Oct 23. 2021

아빠도 가끔은 청춘이고 싶다

중간 기착지인 로마에서는 23시간 동안 잠시 체류하는 레이오버 일정을 보내기로 했다.

수화물은 로마가 아닌 우리의 본래 도착지인 프랑크 푸르트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는다던가 하는 수고로움은 생략되었다.

별 것 아닌 절차 하나가 빠지니 예상보다 입국이 수월하게 진행되어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누구보다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예상보다 이른 시간 숙소에 도착해 서둘러 체크인을 하고 배정된 방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그러자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걸 알아챈 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출출하다는 아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흘려버리고 엄마 말처럼 매가리없이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내가 시차와의 싸움에서 밀리고 있는 사이 우리들 중 제일 빠릿한 동작으로 어느새 샤워를 마친 아빠가 말끔해진 얼굴로 무언가를 찾았다.

종종걸음으로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배회하던 아빠가 다급한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여보~! 리모컨 어디 있어?"


내 집도 아닌 곳에서 리모컨부터 찾는 남편이 답답했는지 "아니 리모컨은 왜요? 내가 로마까지 와서 리모컨을 찾아줘야 해?" 하며 엄마가 소리를 빽 지른다.

저 양반은 텔레비전 없으면 하루도 못 살 양반 이라며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딸아이가 어디서 어떻게 찾았는지 할아버지에게 리모컨을 건네며 말한다.


"할아버지~! 여기 있어! 우리 재미있는 거 보자~"


드디어 애타게 찾아 헤맨 '리모컨 님'을 손에 넣은 아빠는 마치 숭고한 의식을 치르듯 공손하게 또한 성스럽게 전원 버튼을 눌러 텔레비전을 틀었다.

'쏴아아..'

이리저리 채널을 바꾸며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내던 화면이 갑자기 헐벗은 여자의 샤워 장면에 고정됐다.


화면 속의 여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뒤태를 내보이며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뒤를 흘끔 돌아보고 있었고 화면 속 그녀와 자꾸만 눈이 마주친 아빠는 괜한 헛기침만 하고 있었다.

분명 이 장면은 채널을 돌리다 걸려든 우연이었을 거다. 아빠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화면 속 그녀를 치워버리기 위해 연신 채널을 바꾸려 했으니까. 하지만 어쩐 일인지 텔레비전 화면은 한치의 미동도 없이 하얀 비누 거품을 씻어내는 그녀의 늘씬한 다리를 클로즈업하고 있었다.

잊고 지낸 약속이 불현듯 생각난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아빠의 시선이 바로 지척에 서있는 손녀딸에게 향했다. 당신보다 더 집중한 시선으로 화면 속 그녀에게 푹 빠진 손녀딸의 모습을 본 아빠는 손에 잡힌 리모컨이 뜨거운 감자라도 되는 듯 어쩔 줄 몰라했다. 그렇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삼대는 낯 뜨거운 장면을 필터링 없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아빠는 나쁜 짓을 하다 부모님에게 들킨 아이처럼 난감해하며 채널 변경 버튼을 연신 눌렀다. 하지만 야속한 리모컨은 볼륨을 최대로 끌어올려 샤워기 물소리만 더 크게 쏟아낼 뿐 여전히 화면 고정 상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손녀딸의 시선이 민망했던지 아빤 급기야 화면을 몸으로 가린 뒤 마구잡이로 리모컨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면 앞을 가로막은 할아버지가 못마땅 했던지 아이가 한마디 한다.


"할아버지 좀 비켜봐 잘 안 보여. 그리고  물소리가 너무 커 시끄럽잖아~근데 왜 저 언니 씻는 것만 보는 거야~우리 그냥 만화 보자"


그때였다.'언니 씻는 것만 보는 할아버지' 소리에 손녀딸 밥 거리를 찾고 있던 엄마가 화들짝 놀라 화면과 아빠를 번갈아 쳐다봤다.

화면 속 그녀는 이제 막 샤워를 마친 뒤 수건 한 장으로 몸을 칭칭 감고 남자 친구와 아슬아슬한 포옹을 나눈 상태였다. 뭐 그다지 민망해할 것 없는 상황이랄까?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아빠와 엄마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민망함으로 가득 차 경직된 얼굴의 엄마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아빠를 다그쳤다.


"아이고~이 양반이, 12시간 비행기 타고 날아와서도 텔레비전을 보고 있어~정력이 뻗쳤어? 내가 진짜 네 아빠 때문에 한시도 편할 날이 없어~~"


엄마는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 아빠 손에 들린 리모컨을 낚아챘고 연신 주책바가지를 찾으며 아빠를 책망했다. 여행 첫날부터 민망한 사건의 주인공이 된 아빠는 머쓱하게 텅 빈 이마만 쓰다듬을 뿐.


"엄마~ 괜찮아~이런 장면은 유럽에서 흔해~~ 애도 알 건 알아야지~뭘 쑥스러워하고 그래~"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재미있어 장난 삼아 뱉은 말이 기폭제가 된 것일까? 난감함에 분주해진 엄마가 어깨를 한껏 움츠린 채 배터리를 넣었다 뺏다 정신이 없다.

유럽에서는 흔한 장면을, 헐벗은 언니가 샤워를 끝내고 거실로 나가 애인과 다른 무언가를 하려던 정말 별것 아닌 장면을 차마 어린 손녀딸에게 보일 수 없었던 할머니는 작동하지 않는 종료 버튼을 부실 듯이 반복해 눌렀고 그런 노력을 가상히 생각한 리모컨은 마침내 삐 소리와 함께 화면을 말끔히 닫아 주었다. 역시! 해결사!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아빠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직 침묵의 단계이긴 하나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공포의 다음 단계까지 남은 시간은 길어야 10분 남짓. 그 안에 어디로든 몸을 숨겨야 했던 아빠가 잠이 안 온다며 호텔 순회를 핑계로 꽁지 빠지게 방을 빠져나갔다.


내가 저양반 뒤치다꺼리하느라 니 나이 때 반 백모가 되었다며 철딱서니가 애만도 못하다고 구시렁거리는 엄마를 달랜 뒤 티브이 속 헐벗은 그녀의 다음 행보를 상상하길 벌써 30분.  

이미 호텔 순회가 끝나고도 남을 시간 돌아올 생각이 없는 아빠를 찾아오라는 엄마의 지령이 떨어졌다. 이럴 땐 묻고 따지지도 말고 외친다. 예스! 마덜!


분명 리셉션 직원 누군가와 꼬따꼬따(방글라데시 말로 수다)를 떨고 있을 아빠였다. 그런데 뭐지? 로비에도, 발코니에도 아빠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들뜬 기분에 취해 심야 산책을 나가셨나 걱정하던 그때였다.

시끌벅적한 음악소리가 리셉션 너머 작은 바에서 흘러나왔다. 혹시나 싶어 음악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자 넓은 바에 홀로 앉아 흥에 취한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좁고 길쭉해 앉기 불편한 바 의자에 불편하게 걸터앉아 한눈에 봐도 자식보다 어린 그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아빠는 박장대소하며 숨이 넘어갈 듯 웃는 어느 커플의 모습을 볼 땐 덩달아 웃다가 휘청 거리며 옆 테이블의 술을 쏟은 문신이 가득한 남자를 봤을 때는 팔이라도 잡아주려는 듯 손을 앞으로 뻗어 올렸다.


선뜻 그 난장판의 상황 속에 발을 내딛지 못한 나는 아빠가 날 봐주길 바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알 수 없는 아련한 눈빛의 아빠를 보게 되었다. 그러자 그 표정이 내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아주 잠깐만! 정말 잠깐만 날 혼자 내버려 둬...'


오고 가는 사람에 치여 아빠의 모습을 지켜봤다. 젊음이 폭발하는 저 구도엔 조지 클루니 정도가 돼야 완벽한 그림이 되는데 작은 체구의 대머리 아빠가 덩그러니 앉아있는 광경은 마치 완벽한 그림에 잘 못 찍은 점처럼 어색해 보였다.


멀찌감치서 어색한 아빠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들과 아빠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 봤다. 한 번 벌어지면 절대 좁혀질 수 없는 거리. 삶과 죽음처럼 한 끗 차이지만 결코 원상복구 되지 않는 거리. 그게 바로 젊음과 늙음의 거리, 아빠와 저들의 거리겠지.


실수로 벌어진 틈이 궁금한 아빠. 하지만 한치의 틈도 내어주지 않는 젊은 그들을 보고 있자니 아빠의 모습이 마치 풀어진 실밥 처럼 보여 안쓰러웠다. 저들과 대비된 아빠의 쓸쓸한 얼굴을 마주하자 갑자기 우리 아빠가 나이 든 노인같이 보여 왈칵 눈물이 났다.


아빠를 불러내 호텔 근처 마트에서 맥주를 샀다. 그리고 방금 전과는 분위기가 다른 발코니에 기대앉아 사이좋게 맥주를 마셨다. 따뜻한 로마의 밤바람을 맞아서 그랬을까? 맥주가 달달하다.


"아빠~! 아까 거긴 왜 가셨어? 난 귀가 아파서 그런데 싫던데... 시끄럽고 흥청 거리고."


"아빤 괜찮았는데? 글로발 시대니까 외국 청년들이 어떻게 노는지 보니까 재미있더라..."


"와... 진짜? 난 힘들어서 하래도 못해.... 어떻게 저러나 몰라. 춤추고 소리 지르고..."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나를 보고 아빠가 말했다.


"니 나이 때는 신경 쓸 곳이 많으니 그렇지. 남편 신경에, 자식 신경, 사는데 신경 쓰다 보면 저럴 힘이 있나...

그런데 저 때는 다른 신경 쓸 것 없이 오직 나 자신만 생각하면 되는 때니까 가능한 거지."


"저렇게 즐길 수 있는 것도 일종의 특권인 거야. 젊음의 특권. 인생의 제일 파릇한 한 때에 자신의 특권을 누리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냐."


"아빠 때는 아무리 젊다고 한들 특권을 누리며 사는 게 쉽지 않았잖아.... 저렇게 젊음을 특권 삼아 누릴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고. 먹고사는 게 우선이니 그러면 안 될 것 같았고 그러다 보니 시간은 흐르고, 다 늙어서 하면 주책이란 소리나 듣고. 허허"


"저 친구들 보니까 걱정 없이 마냥 즐거울 수도 있구나.... 실수하는 것도 좋아 보일 수 있구나.. 대리 만족하는 것 같아 좋았지~"


아빠는 딸에게 고백이라도 하듯 맥주 한 모금에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지금까지 손주들 재롱에 할머니되길 잘했다는 엄마와 달리 환갑을 한 참 넘긴 나이임에도 하고 싶은 게 많아 할아버지 타이틀을 불편해했던 아빠를 나는 몽상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본 아빠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심지어 엄마보다 당신이 나이 들고 있음을 빠르게 인정하고 받아들인 현실주의자와 같았다. 누군가의 젊음이 부러울 만큼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는.


아빠의 아릿한 속 마음을 알게 되자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그저 야속하기만 했다.

나와 저 젊은이들 사이에 생긴 틈 보다 더 많은 틈이 벌어진 아빠의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그저 안타까웠다. 왜 진작 알아채지 못한 걸까.....



이미 맥주캔은 비워진 지 오래였지만 '빨리 들어 가자'고 차마 재촉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오늘이, 아빠가 그들을 보면서 잠시라도 잡고 싶어 했던 '청춘의 순간'일 것 같아서 말이다.


'엄마 걱정하시니 조금만 있다 들어오시라'는 당부를 남기고 혼자 방으로 들어오자 엄마의 시름 소리가 커졌다. 이제는 철도 들고 세상 무서운 것도 알았으면 좋겠는 남편이 36년을 한결같이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구니 엄마도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빠의 속 마음을 알게 된 오늘은 아빠를 대변하는 게 옳았다.


"엄마~아빠도 가끔은 다시 청춘이고 싶을 때가 있겠지~그러니 오늘은 한 번 봐줘요"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래도 아빤 여전히 청춘이니까.

늙어도 청춘이니까 오늘 밤은 아빠 마음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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