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킬번댁 Oct 23. 2021

사진 한 장.

시차 적응에 보기 좋게 실패해 몽롱한 상태로 새벽을 맞이했다. 오늘 일정을 마무리 지으려면 서둘러 움직여야 하는데 많이 피곤했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억지로 정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불쑥 든 생각. '아참! 나 여행 왔지?'

여행의 미학은 여유로움 아니었던가. 고작 한두 시간 여유 부린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지 싶어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뭉기적 거리며 눈을 도르르 굴리니 분주한 엄마가 보인다. 이제 겨우 6시. 조금 더 주무셔도 됐을 시간에 왜 벌써부터 일어났는지 묻자 "어떻게 온 여행인데 서둘러야지, 게으르면 쓰나" 하신다.


내 엄마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엄만 너무하다 싶을 만큼 부지런하다. 즉흥적으로 일을 만드는 (엄마 말에 의하면 사고를 치는) 아빠의 일명: 뒤치다꺼리를 하도 해 싸서(역시나 어머니 말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실함이 능력이 됐다고 했다. 무슨 어벤저스 파워 능력도 아니고, 여행까지 와서 식구들 치다꺼리하는 능력이 뭐가 그리 대수라고 짐을 미리 싸 놓은 건 두말하고 손녀딸 간식까지 챙겨놓은 엄마를 보고 있자니 너무 속상했다.


몇 걸음만 걸어가면 남이 차려준 밥상이 기다고 있고, 설거지할 일도 없고, 청소할 일도 없는데 뭐하러 사서 고생일까 답답해 그만하고 엄마도 좀 즐기라고 말했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


'호사도 누려봐야 알고, 남도 부려봐야 부릴 줄 알지. 지금껏 이러고 살았는데 갑자기 하지 말라고 하면 나도 어색해.'


우리 엄마 참 한결같다.


엄마가 저리 바쁘게 움직이는데, 정작 자식이라는 사람이 누워만 있을 수 없어 자리를 털고 있어 났다. 눈곱만 떼고 식당에 내려가 미리 주문한 카푸치노를 기다리며 오늘 있을 일정을 위해 로마 관광 지도를 펼쳤다.


지도를 펼치자 로마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왼쪽 구석에 있는 바티칸 시국도, 로마를 가로지르며 흘러가는 테베레 강도, 지도 오른쪽 아랫부분에 펼쳐진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까지. 이렇게 한눈에 로마가 들어오는데, 가야 할 곳이 이렇게나 많은데, 로마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고작 여덟 시간이라니. 아쉬운 마음에 딱히 어디를 골라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순간 자신 만만한 목소리의 아빠가 오늘의 관광 일정을 말씀하신다.


"오늘은 콜로세움을 제일 먼저 보고--> 근처에 있는 개선문과 포로 로마노를 둘러본 뒤--> 임페리얼 거리를 따라 쭉 걷다가 --> 캄피돌리오 광장을 지나 통일 기념관을 보고--> 베네치아 광장을 건너--> 트레비 분수를 본 뒤--> 공항 택시 픽업 시간에 늦지 않게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일정이 어떻겠......"  


잔뜩 신난 목소리로 오늘의 일정을 추천하던 아빠가 주춤하더니 손녀딸의 눈치를 살폈다. 지난번처럼 '대장님 노릇'을 했다가는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손녀딸에게 혼이 날 게 뻔해 나름 조심히 행동하는 것이다. 손녀딸의 시선이 먹음직스럽게 놓여있는 빵에 머물고 있는 것을 확인한 아빠가 이번엔 조심스레 속삭인다.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내 말 무슨 말인지 잘 알았지? "

테르미니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콜로세오 역 까지 두 정거장. 도보로는 20분.

만약 누군가 콜로세움을 관광할 계획이 있다면 '필히' 지하철을 타고 ' 콜로 세오 역까지 가주십사 부탁하고 싶다. 특히 이탈리아 로마가 처음이라면, 콜로세움 역시 처음이라면 반드시 지하철을 타고 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콜로세움의 진짜 모습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지금부터 눈을 감고 상상해보라.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 역사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갑자기 역한 찌린내가 사방에 진동한다. 대체 어디서 나는 냄새인가 싶어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언제 왔는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노숙자가 내 옆에 있다. 깜짝 놀라 몸을 피해 내려가면 그래피티가 가득 칠해진, 과연 움직일까 싶은 지하철이 덜컹 거리는 소리를 내며 들어온다. 그런데 웬일인지 문이 열리지 않는다. 말끔한 전동차의 자동문을 겪은 나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다. 내 뒤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날 이상한 듯 바라본다. 당황해 주저하자 뒤에 있던 관광객이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연다. 세상에.... 손잡이를 돌려야만 문이 열리는 지하철 이라니. 관광 대국이라더니 시설은 우리나라보다 낙후되어 있어 적잖은 실망이 생긴다. 덜컹 거리는 지하철에 중심을 잡는 사이 낯선 남자 둘이 내 뒤를 바짝 붙는다. 시선이 불편해 몸을 틀면 그들 역시 자연스레 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그들의 시선은 내 가방에 닿아있다.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유럽의 소매치기를 마주한 순간이다. 가방을 가슴팍에 움켜쥐고 그들의 수작을 알아챘노라 신호를 보낸다. 계획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지 두 눈이 벌건 소매치기는 다음 타깃을 찾아 되돌아 간다. 고작해야 두 정거장 밖에 안 되는 구간인데 신경이 곤두선 나는 이미 진이 빠졌다. 이탈리아의 이면을, 아니 현실을 마주하고 보니 기대감보다는 실망감이 더 크다.


그렇게 얹은 실망감을 안고 콜로세오 역에 도착했다. 넘치는 인파가 뿜어내는 세계 각국의 땀냄새를 맡으며 밀려 밀려 계단을 올라 동굴 같았던 역사를 빠져나가는 순간, 쏟아지는 태양빛에 주춤 거리는 사이.

고개를 들어 천천히 앞을 바라본다. 뭐가 나타났을까?



거대하고 웅장하며 화려한, 단 몇 초만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극강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콜로세움이라는 거인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서있다. 방심한 사이 콜로세움이 내 시야 안에 우격다짐하듯 거칠게 들어온다.

실망이 환희가 되는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 울컥해지는 순간.

이것이 바로 지하철을 타고 가야만 느낄 수 있는 콜로세움의 감동 포인트이다.


다른 식구들에게도 로마 지하철 마법이 통한 걸까? 부모님도, 딸아이도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못한 채 그저 낮은 탄성과 함께 눈을 떴다 감았다만 반복할 뿐이다.

그리고 겨우 내뱉은 한 마디  "믿을 수 없다......"

우린 눈앞에 있는 콜로세움이 믿기지 않아 좀 더 가까이, 손에 닿을 거리까지 다가갔다. 주변엔 혹시 모를 테러를 대비해 정차된 탱크와 총을 든 군인들 때문에 경직된 분위기이긴 했지만 그들의 위협적인 모습은 이미 콜로세움의 아름다움에 묻힌 지 오래. 아름다움이 공포를 이기는 순간이다.


그때였다. 콜로세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연신 '대단하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던 아빠가 수줍은 고백이라도 할 마냥 나를 찾는다.


"딸내미. 아빠랑 같이 사진 한 장 찍자!"


사진기 앞에만 서면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나온다며 평소 사진 찍기를 싫어하던 아빠였다. 그랬던 아빠가 사진을 찍고 싶어 한다고? 그것도 나랑 단 둘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아빤 이미 내 옆으로 와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이가 자기도 같이 찍겠다며 달려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 평소 손녀딸이라면 끔뻑하던 아빠가 '할아버지도 엄마랑 사진 찍고 싶어서 그렇다'며 아이를 돌려보내는 게 아닌가. 엄마랑 할아버지가 자기만 쏙 빼놓고 사진을 찍자 아이는 입을 삐쭉이며 고개를 돌린다.

차렷 자세를 하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아빠가 날 부르며 말한다.


"어서 찍자."


얼떨결에 아빠 오른편으로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세가 잡히지 않고 몸이 굳어졌다. 아빠의 갑작스러운 '사진 찍기 러브콜'에 당황을 했는지 얼굴 근육이 뻑뻑해져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몸만 당황한 게 아니었다. 마음도 그랬다. 엄마와 함께 있을 때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찍어도 즐거울 만큼 편했던 마음이 아빠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여간 멋쩍고 어색했다.


생각해보니 중학교 졸업식 사진을 마지막으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아빠와 단둘이 사진을 찍어본 기억이 없다. 고작해야 다른 식구 둘, 셋이 모이거나, 가족 모두가 함께 단체 사진을 찍을 때나 함께했지, 오늘처럼 마음먹고 다정함을 연출해 본 적이 없었다.


아빠는 어깨동무를 하고 싶은 듯 손을 어정쩡한 높이까지 들고는 어쩔 줄 몰라했다. 편한 부녀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까이 붙어 사진을 찍으려니 아빠도 어찌할 바 몰라하는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차라리 아빠의 손이 방황할 때 내가 먼저 팔짱이라도 꼈으면 좋았으련만 온 몸에 가시가 오소소 돋친 사람처럼 차렷 자세를 풀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아빠의 길 잃은 손을 구원하지 못했다.




방황을 멈춘 손은 뽐내듯 양쪽 허리춤에 자리를 잡았고 그와 반대로 차렷 자세로 꼿꼿이 서 있는 나는 누가 봐도 톡! 치면 쓰러질 도미도 게임의 블록 같았다. 누가 이 장면을 보고 편한 부녀 지간이라 생각할까. 아빠와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응시하고 있으니 마음이 복잡했다.


아이들 앞에서 무게를 잡아야 위신이 서는 시대의 아버지들처럼 아빠 역시 사랑과 미소에 인색한 분이었다. 사탕이 맛없다고 그 자리에서 뱉은 다섯 살 딸이 감사할 줄 모르고 낭비만 하며 자랄까 봐 회초리를 들거나, 내가 생각을 말하려하면 버릇없다며 선부터 긋는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손주들의 탄생과 동시에 부드러운 할아버지가 되더니 심지어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한다.

혹시 자식들에게 못한 애정 표현을 손주들에게 대신하며 지나간 아버지로서의 그릇된 행동에 후회와 자책을 하시는 게 아닐까, 혹시 지금 사진을 찍자고 하는 말은 내게 내미는 아빠의 사죄의 뜻 같은 게 아닐까.

고작해야 사진 한 장인데 생각은 이미 가지를 뻗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할머니 옆에 기대 있던 아이가 갑자기 달려와 안기며 이번엔 자기도 같이 찍자고 말한다.'아.. 벌써 다 찍은 건가?' 이번엔 아이를 핑계 삼아 표정을 방금 전 보다 여유롭게 지어봤다. 몇 장쯤 찍었을까? 반대편 자리에서 사진을 확인하던 엄마가 갑자기 고꾸라지듯 웃는 게 아닌가.


"하이고. 누구 딸 아니랄까 봐. 둘 다 표정 좀 봐라. 큭큭"


사진 속의 내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진창 못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빛은 초점을 잃었고, 광대뼈는 한쪽만 올라가 경직돼있고, 입은 헤벌 쩍 벌려 웃고 있는 요상한 얼굴.더 웃긴 건 내 옆에 나와 같은 표정을 한 사람이 또 한 명 존재한다는 것.


"아.. 이게 뭐야~ 아빠랑 나 표정 왜 이래... 다시 찍어! 다시!"



이 사진을 그대로 남겨 뒀다가는 망신살이 제대로 뻗칠 것 같아 이번엔 내가 먼저 아빠에게 사진 찍기를 제안했다. 이번엔 방금 전과 다른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아빠 옆으로 다가가 팔짱을 끼고 고개도 살짝 아빠 어깨에 기댔다. 찰칵! 아까보다는 조금 나아진 듯 하지만 여전히 엉망인 아빠와 내 얼굴.


그제야 알았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마음을 자주 표현해 주어야 그 사이에 어색함이 껴들지 않는다는 것, 뻔한 사랑도 표현하는 만큼 자연스러움이 쌓인다는 것을 말이다. 어색한 사진 찍기 미션이 끝나자 아빠는 방금 찍은 사진을 보며 깔깔거리고 웃는 나를 뒤로하고 콜로세움을 지긋이 바라보셨다. 콜로세움과 아빠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그림 같은 모습을 마음에 기억하며 우리 아빠도 저기 저 콜로세움처럼 세월의 힘을 버티며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행복한 부녀지간 사진을 일조오억 개만큼 찍을 때까지 말이다.


"아빠~ 앞으로 사진 찍을 때 '나는 됐다~' 그러지 말고 같이 찍어요~ 남는 건 사진밖에 없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