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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Oct 23. 2021

아버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세요.

창문을 열자 따스한 햇살을 타고 침대 주변으로 새소리가 쏟아졌다. 어떤 종류의 새 인지는 알  지만 쉬지 않고 목소리를 뽐내는 걸 보니 수다쟁이 새 일 것이 분명했다.

쉴 새 없이 떠드는 새들의 이야기 소리를 듣고 있자니 17년 전 초라한 이십 대의 모습으로 하이델 베르크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지금처럼 평화롭고 따스했었다그 따스함에 위로받고 삶의 용기를 얻을 수 있었는데.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함없이 다정해주다니맞아. 하이델 베르크는 그런 곳이었어.


그래서였을까. 언젠가 다시 하이델 베르크에 게 된다면 그땐 함께하는 사람이 가족이고 싶었. 그래서 내가 느낀 다정한 위로를 , 괜찮을 거란 안도를 가족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그랬던 막연한 소망이 고맙게도 이루어질 줄이야.


창가에 기대 보드라운 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귀를 기울이니 햇살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이쁘고 사랑스러운 아침을 본 적이 있었던가? 자연이 속삭이는 소리를 혼자 듣고 있을 수만은 없어 아이를 깨웠다.


아이와 함께 창가에 기대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하이델 베르크와 아침 인사를 나눴다.


"안녕? 하이델베르크~"


아이의 인사가 기분 좋았는지 산 넘어 풀내음을 가득 실은 바람이 인사한다.


"나도 반가워."



평화로운 느긋함도 잠시 아빠가 방에 없다! 장거리 유럽여행은 어르신들에게 극기 훈련과도 같다며 걱정하던 주변의 말에 코웃음이 쳐지는 순간이다. 언제 일어나 어디로 사라지신 걸까. 엄마에게 아빠의 행방을 묻자 아니나 다를까.


"니 아빠 아침 댓바람부터 누가 못 가게 잡을까 봐 꽁지 빠지게 호텔 정찰 나가셨단다."


고작해야 호텔 테라스를 벗어나지 않았을 아빠였지만 그래도 외국 아니던가. 혼자 돌아다니다가 괜한 일이라도 당할까 걱정되어 서둘러 방문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식당 중앙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 아빠가 보였다.


"그래. 왔니? 시리얼은 이쪽이고, 우유는 저쪽. 햄이랑 치즈가 맛이 끝내준다. 마음껏 먹어라."


아빠는 정찰을 끝낸 조식당 메뉴를 친절히 설명해 주시더니 시범이라도 보이듯 빵을 반으로 갈라 버터를 쓱쓱 바르고 그 사이에 햄과 치즈, 오이와 토마토까지 가득 집어넣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보란 듯이 먹기 시작했다.


터질듯한 볼을 타고 나오는 바삭한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아빠는 강경한 한식파 아니었던가? 그래서 호텔도 취사가 가능한 곳을 예약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 아빠 빵 덕후였던 거야?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확인차 물었다.


"아빠.... 지금 아빠가 먹는 거 빵이야. 밥 아니고. 혹시 연기하는 거 아니지?? 진짜 맛있어서 드시는 거지?"


"히야.... 여기 독일은 빵도 맛있고, 햄도 맛있고, 치즈도 맛있어! 어떻게 된 나라가 나쁜 게 하나 없어~!!"


그날 처음 알았다. 우리 아빠는 하나가 좋으면 열 가지 백 가지가 묻고 따지지 않고 무조건 좋음 일색이고, 성격부터 식성까지 참으로 버라이어티하고 긍정적이라는 사실을.


아빠의 호들갑 빵 산매경에 덩달아 빵을 밥처럼 먹은 뒤 오늘 둘러보기로 한 철학자의 길을 가기 위해 호텔을 나왔다.


하이델 베르크의 얼마 없는 관광 명소중 하나인 '철학자의 길' 은 이름 그대로 '철학자들이 사색을 즐겨했던 길'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곳이다. 뱀을 닮아 좁고 구불 거리는 길일뿐이지만 사계절 내내 변함없이 아름다운 산책로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고즈넉함이 있어 예전부터 철학자들이 즐겨 찾은 곳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철학가인 괴테 역시 이곳을 산책하며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하니 그들이 사색한 길을 함께할 생각에 벌써부터 설렌다.


호텔을 나와 마르크트 광장에 들어서자 작은 성조기를 가슴에 붙인 부지런한 패키지팀이 보였다. 부모님 연배와 비슷해 보이는 분들이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아빠를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손주 생각하는 마음은 지구촌 일심동체인 걸까? 엄지를 올린 그들의 마음이 어렴풋이 짐작되어 기분이 묘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카를 테오도르 다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다리 건너 좁은 골목 입구에서 시작되는 산책가의 길을 가기 전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의식이 있다. 바로 다리 시작 지점으로부터 왼쪽에 있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원숭이 동상과 사진을 찍는 일이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하이델 베르크 대학' 이 있는 곳, 유수한 철학자들이 사랑한 도시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이 원숭이 동상에 머리를 넣거나 청동 거울을 만지면 현명한 사람이 된다던가 똑똑한 아이가 태어난다는 전설이 있다. 덤으로 원숭이 옆 생쥐 동상의 동전을 만지면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 까지.


돌 하르방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진 않았지만 누구나 믿고 싶어 반드시 만져보는 것처럼 똑똑해지고 부자가 된다는데 부적 같은 원숭이 동상을 모른 척할 이유가 없었다.


식구들을 불러 모아 인생 역전의 염원을 담아 동상과 사진을 찍고 마지막으로 아빠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아빠는 사진 찍을 생각은 하지 않고 원숭이 얼굴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불안한 혼잣말을 한다. 느낌이 이상했다. 잠시 뒤  아빠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 여기 원숭이 동상 속에 들어가면 더 똑똑해지고 더 부자가 되겠네!"


물론 그런 전설도 있다고, 그런데 누가 굳이 창피하게 동상 아래로 들어가 원숭이탈을 쓰고 사진을 찍겠냐는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런 사람이 흔치 않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 얼마 안 되는 사람이 아빠는 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원숭이 동상 안으로 머리를 넣는 아빠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버지 말 좀 끝까지 들으세요. 제발.


아빤 원숭이 동상에 머리를 집어넣고, 공간이 좁았는지 코가 눌려 얼굴이 살짝 밀린 상태로 불편하게 서있었다.  남사스러워 못살겠으니 빨리 나오라는 엄마의 말은 허공에 산산이 흩어졌고 대체 무슨 고집 때문인지 원숭이탈을 쓴 아빠는 사진기 셔터음이 들리기 전엔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딸아이가 덩덕깨비처럼 자기도 저렇게 찍겠다며 팔을 잡아끌었다. 경악을 금치 못할 상황인데 웃음이 터져버렸다.


안된다는 내 말에 심통난 아이가 이번엔 동상 안에 들어간 할아버지 바지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엄마는 창피하다고 이미 저 멀리 도망가버린 상태, 터져나온 웃음 뒤로 어찌 할바를 모르겠는데 설상가상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동상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 아빠! 진짜 창피하게 왜 그래. 제발 나와요 쫌!! "


결정을 내려야 했. 도망간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 사이에 숨어버렸고 내 로 사진을 찍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빠를 끌고 나오긴 글렀으니 차라리 빨리 사진을 찍고  딸내미를 진정시키는 게 최고의 수였다. 그런데....당황한걸까?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총체적 난국. 대환장 파티의 순간.


얼떨결에 사진을 찍고 원숭이탈에 머리를 들이미는 아이를 달래며 자리를 뜨려는데 아빠의 기이한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본 관광객이 물었다.


"혹시 지금 방송 촬영 중이에요?"


진땀 나는 이 상황을 단순히 코미디 방송 촬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으로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원숭이 동상 안에 들어가 있었던 아빠는 둘째 문제였다. 수군 거리며 모여든 관광객이 날 보며 이것저것 묻는다.


빠르게 상황을 종료하고 싶은 소망이 불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여기 이 원숭이가 뭘 뜻하는데요? "


"아...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똑똑해지고 부자가 된데요..."


"그럼 아까 저분처럼 찍어야 부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난 머리가 커서 안 들어갈 것 같아서요."


"원숭이가 갖고 있는 거울을 만지면 부자가 되고, 원숭이 얼굴에 머리를 넣고 사진을 찍으면 머리가 좋아지거나 똑똑한 자식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어요. 반드시 꼭 머리를 넣고 찍어야 해요. 안 그러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초라하지만 그럴듯한 변명이 담긴 설명을 그들에게 전하자 주변에 모여들었던 관광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보여준 아빠의 행동이 소원을 빌기 위한 정석이라도 되는 것 마냥 너도 나도 동상에 머리를 넣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나야 덜 민망한 상태로 자리를 피할 수 있어 좋았지만 볼살을 밀려가며 동상 아래로 얼굴을 들이미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사기꾼이 된 것만 같았다.


사진을 찍는 몇 분이 천년 같았는지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있다.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아빠는 손녀딸과 잡기 놀이를 하며 앞서간다. 그런 아빠에게서 개구쟁이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언덕길을 오르며 생각해보니 아빠의 행동을 부끄러워만 할게 아닌 것 같았다. 체신머리 없다며 아빠를 막아서는 엄마의 말도 충분히 동감 하지만 체신머리가 없는 아빠 덕분에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신나고 재미있게 해 드릴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덩달아 재미있는 추억이 만들어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철학자의 길 중턱에 놓인 의자에 아빠와 나란히 앉았다. 손녀딸과 다정히 사진을 찍는 엄마를 보는 아빠의 시선에 사랑이 담겨있다.


"아빠. 행복해?"


"그럼. 행복하지. 그걸 말이라고. 지금까지 이렇게 나 답게 행복해 본 적이 없다."


아빠와 함께 여행을 오지 않았다면 평생 아빠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호기심도 많고 엉뚱 한 모습. 가부장적 근엄한 틀 안에 깨 발랄한 아빠가 들어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처음엔 색다르고 신선하지만 그 자유로움이 너무도 방대해 솔직히 겁나고 지치기도 했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아빠의 매력에 빠지다 보니 이런 즐거움을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나 싶었다.


꽃이 한가득 핀 화려하면서도 담백한 6월의 하이델 베르크에서 아빠의 진심을 만났다.

순수하고 맑은 아빠의 진짜 모습. 멀지 않은 거리에서 함께 웃을 수 있는 행운. 그래서 감사하다.


함께 여행 동무가 되어준 아빠가 참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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